게로스와 거울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이상한 이카리아의 사신들이 별관으로 물러간 후, 게로스는 왕의 거처로 돌아와 뭔가 엄청났던 그날 저녁의 일을 되새겨 보았다. 이카리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저런 이상한 사람들을 사신으로 보낸 것일까? 사실은 이카리아가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인가? 마르셀 왕이 보낸 사신이라면 안 봐도 뻔하지만 그래도 저 지경은 아니었는데,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인사말도 제대로 못 마쳐서 게로스가 뒷부분을 대신 읊어준 여자(제일 이상했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내밀어 보인 이카리아 왕의 인장이 찍힌 사신 파견서에 쓰여 있는 공식 직함은 『세르비카 특명전권사절 세라비』였다. 나중에 올라온, 이상한 여자와 어딘지 닮은 것 같은 키 큰 남자의 이름은 심지어 거기 쓰여 있지도 않았다. 대화를 들어 보니 남매인 것 같은데, 설마 사신으로 가는 누나를 따라 칼베르에 관광하러 온 건 아니겠지?
세르비카는 이카리아에서도 칼베르에서도 흔한 성은 아니었다. 게로스가 아는 세르비카라면 이카리아의 심약하고 무능한 왕 마르셀 13세를 보좌해서 온갖 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비서실장 세르비카 경뿐이었다. 게로스는 이카레이유에 방문했을 때나 혹은 세르비카 경이 사신단을 이끌고 칼베르에 방문했을 때, 평민 출신이면서 고위직까지 올라 대단한 욕심도 부리지 않고 말 그대로 왕을 충실히 보좌하는 세르비카 경을 보고, 칼베르에도 저런 관록 있고 충성스러운 대신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의 곁에도 훌륭한 신하들은 많았지만, 왕이 아무것도 안 하는 나라를 신하의 힘으로 돌아가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카리아가 아직 안 망하고 있는 것은 게로스가 보기에는 온전히 세르비카 경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저 이상한 사신과 그의 남동생인 듯한 남자는 세르비카 경의 친척일 수도 있었다.
‘세르비카 경이 보낸 사람이라면, 겉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지.’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게로스는 이어서 두 번째로 난간을 타고 올라온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평범한 사신은 아니었다. 그는 사신 예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틀림없이 마법사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게로스에게도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세상 그 어느 마법사도 그렇게 요란하고 장식이 많은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라마야나의 지팡이였다. 게로스는 책상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던 이카리아 왕의 인장이 찍힌 파견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브리엘 차석사절 레이』
브리엘은 라마야나의 성이었다. 그는 라마야나의 아들이거나 적어도 성을 물려준 후계자임에 틀림없었다.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시종이 옷 갈아입는 것을 도우러 들어왔다. 그는 게로스의 거처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침실과 연결된 의복실에는 거대한 삼면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게로스는 거처 안에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지만, 의복실에는 웬만하면 혼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거울을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종은 게로스가 금색 자수가 놓인 붉은색 긴 겉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이카리아 사신들과 저녁을 들기 전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편한 옷을 입혀 주었다. 게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축복이라 칭송하는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은 국민들에게 없던 애국심도 생기게 해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손쉬운 도구였다. 싫어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의 얼굴은 머리와 눈 색깔을 빼고는 놀라울 정도로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닮는 게 뭐가 이상한가? 하지만 게로스는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었다. 그의 아버지는 게로스가 다섯 살 때 쿠젤 강가에서 산책하다 갑자기 쓰러졌다.
어른들,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게로스가 아버지의 병실에 찾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얌전히 아버지가 나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 근처에 우연히 가게 되었을 때는 잠깐만 아버지를 보려고 방에 몰래 들어가 보았다.
거기 누워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보다 더 늙고 시들은, 일그러지고 끔찍한 몰골을 한 사람이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엔 그게 아버지인 줄 몰랐다. 그러나 어머니가 옆에 앉아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맞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게로스를 본 것 같았다. 보았을 수도 있고 못 보았을 수도 있었다.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게로스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바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며칠 후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어머니도 궁에서 사라졌다.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온 나라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외국으로 떠났을 거라고 했다. 게로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하루아침에 부모가 모두 사라진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게로스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었을 때에도 어머니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죽은 것은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자식은 중요하지 않은가? 궁에 있으니 누가 대신 키워줄 거라고 생각하고 나가 버린 것일까?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게로스의 귀에 들려왔다. 파렌베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공주인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여자들을 다 정리하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왕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무슨 병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갑자기 쓰러져 젊은 나이에 죽은 것도 아마 여자관계가 복잡하다 보니 원한을 사서 그런 게 아니겠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게로스가 어려서 못 알아들을 줄 알고 그러는 건지, 너는 그러지 말라고 일부러 들리게 말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게로스는 얼굴 하나로 신분상승했다는 잘 생긴 남자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마치 악당이 나오는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흘려들었다.
외조부모와 왕실의 기대는 이제 게로스에게 쏟아졌다. 게로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랑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가 너무 무거워서 숨 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응석을 받아 주시는 분들이었다면, 그때 게로스가 쿠젤 강변의 플레베르 신전에 놀러 갔다가 발견한, 어느 쓸데없이 성실한 사제가 매일매일 날씨 기록하듯 강물의 변화를 관찰하던 중 누군가의 강력한 원한으로 강에 새겨진 저주의 흔적을 발견하고 자세하게 적어 놓은 그 기록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기록에는 저주를 내린 사람의 이름도 저주를 내린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강력한 힘으로 저주를 시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위급 사제나 마법사임에 틀림없다고 적혀 있었다. 저주를 받을 자의 이름은 번뜩이는 핏빛을 띠며 삼일 밤낮으로 강물 위를 떠돌다가 마침내 강물에 삼켜졌다고 했다. 사제는 그것도 역시 성실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게로스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성이었다. 아버지는 결혼으로 왕가의 일원이 되면서 어머니 쪽 성을 받았다. 그러니 파렌베르크, 아니 칼베르 전역에 그 성과 이름을 같이 가진 사람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왕가의 성은 왕가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는 그것 말고도 한 마디가 더 적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과 함께, ‘그의 아들’이라고.
게로스는 당시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 때 기억 따위는 흐릿했지만, 끔찍한 모습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것은 게로스의 미래이기도 했다.
게로스는 그 기록을 몰래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몇 번 더 읽어본 다음 너무 무서워서 태워 버리고 말았다. 게로스 주변에는 그것을 보여주고 상의할 어른도 없었다. 조부모나 왕실의 무서운 어른들은 어머니나 아버지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고, 왕실 마법사였던 라마야나는 게로스가 기록을 발견하기 며칠 전에 그만두고 나가 버려서 없었다.
라마야나는 그의 지팡이만큼이나 요란한 성격의 대마법사였다. 그는 왕실 마법사이자 왕자에게 학문으로서의 마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게로스는 라마야나를 정말 좋아하고 잘 따랐다. 그가 보여주는 마법은 일단 무조건 화려하고 재미있었다. 그 라마야나가 궁에 계속 있었더라면, 게로스도 아마 그 기록을 불태우지 않고 보여 드리면서 이게 정말 아버지 얘기 맞는지, 자기 얘기 맞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제자를 만나러 간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왕실을 떠났다.
‘그렇다면 그 제자가 아까 그 마법사인가?’ 게로스는 이카리아에서 온 젊은 마법사가 들고 있던 라마야나의 지팡이를 떠올리며 다시 생각했다. 자신은 다시 못 봐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궁을 나간 것이 그 녀석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라마야나의 얼굴은 이제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어머니는 더 어릴 때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의 복도에는 게로스와 놀라울 정도로 하나도 닮지 않은 어머니의 초상화가 아직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카를링겐 왕가의 푸근한 얼굴만 빼고, 햇빛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슐로스 루와얄의 높은 탑처럼 투명한 푸른 눈을 게로스에게 물려주었다.
사람들은 게로스를 보고 왕국의 기적, 신의 축복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게로스는 알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외모는 저주를 받아 아버지처럼 하루아침에 시들고 뭉그러질 운명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라마야나마저 사라져 버린 왕궁에서 끝없는 들판에 홀로 선 것처럼 막막했던 나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 그렇게 되는 것일까? 내일 아침일까? 아니면 며칠 뒤일까? 내년일까? 게로스는 밤에는 소리 죽여 울고 낮에는 두려워서 거울도 못 보며 공포로 검게 짓눌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저주가 발현될까 봐 매일 두려워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마도 저주가 아버지한테서 끝났거나, 사제가 잘못 보고 기록했거나, 게로스가 너무 어려서 기록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런 기록을 보았던 것 자체가 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 보려 해도 이미 기록을 게로스가 불태워 버려서 아무것도 없었다. 점차 다시 볼 수 있게 된 그의 얼굴에는 그러나 그날 딱 한 번 본,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 나왔던 그 방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항상 겹쳐 보였다.
소년이 된 게로스는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은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염원하는 자신의 얼굴이 여전히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장차 왕이 될 몸이었으므로,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 앞에서 옷을 입히고 단장을 해줄 시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은 왜 또 그렇게 큰 것만 갖다 놓는 건지. 왕자였을 때 쓰던 방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물려받은 왕의 거처도,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자신의 모습을 피할 수가 없도록 커다란 삼면거울이 세워진 의복실이 딸려 있었다.
게로스는 거울을 볼 때마다 생각과 마음을 텅 비우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것은 거울 속의 자신만이 아니었다. 게로스는 어느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웃거나 찡그리거나 우울한 얼굴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게로스는 거울을 보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왕이 되면 매일매일 지어야 하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때까지.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