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정보국장 코린

포플러 나무를 바라보던 그 아이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코린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로스의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이카리아 사신단은 식사가 끝나고 뤼미에르관으로 물러갔다. 게로스는 웃으면서 사신단을 보내 놓고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코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게로스는 아무리 피곤해도 코린을 포함한 측근들 앞이 아니면 절대 피곤한 티를 내지 않았다. 코린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곤 했다.


오늘의 게로스는 피곤한 얼굴로 심지어 짜증까지 내고 있었다. 코린은 그가 짜증 내는 것까지 볼 수 있는 극히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도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닌데 내가 이카리아 위급한 것까지 챙겨 줘야 되나?” 게로스가 말했다. “오스틴하고 스칼하븐하고 전쟁한 지 벌써 4년이나 됐는데, 리스코바나 티르윈 같은 나라들이 다 전쟁에 말려드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사람을 보내? 그 나라는 평소에 위기의식 같은 건 전혀 없나?”


“아무래도 저희한테 의지했겠죠.” 코린이 대답했다. “국경도 막혀서 브뤼메 산맥을 통과해서 왔다고 하니, 그전까지는 아마 저희가 어떻게 해줄 줄 알지 않았을까요.”


“하나밖에 없는 왕자한테 산을 넘게 할 정도의 강단은 있으면서 전쟁 대비 같은 건 할 생각도 안 했나 보군.”


“뭐, 혹시 압니까. ‘이카리아제 신무기’를 뒤에서 개발하고 있을 지도요.”


‘이카리아제 신무기’는 게로스가 오스틴과 스칼하븐에 내보낸 첩자들이 입수한 군사 기밀문서에 적혀 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카리아는 신무기는커녕 구식 무기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도 그것은 이카리아를 조롱하는 농담일 것이었다.


“어서 와서 자기네 좀 점령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남의 나라들 싸우는 걸 구경만 하고 있다가 발등에 불 떨어지니 한다는 게 우리한테 찾아오는 것뿐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코린은 게로스가 점점 짜증이 격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달래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그는 게로스가 평소에 모든 사람을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열 살 때 파렌베르크 왕립 학교에서 자신과 동갑인 게로스를 처음 만난 그 순간에도 이미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다.


누군가 “저분이 왕이 되실 분이다.”라고 코린에게 말해 주었다. 게로스 왕자는 학교의 긴 회랑 끝에 서서 포플러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코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든 것을 가지게 될 사람인데, 왜 저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코린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딱 그 정도의 미소만 지어 보였다.


코린의 집안은 대를 이어 카를링겐 왕가의 왕들에게 충성했다. 그러므로 그도 게로스 왕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왕자가 왜 즐거워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하면서도, 그날 이후 쭉 그 어린이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게로스는 왕이 되었고, 코린은 그의 측근 신하가 되었다. 코린은 영리하고 사려 깊었으며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게로스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왕은 코린을 신뢰하고 가까이 두었지만, 그에게마저도 피곤하거나 힘들 때가 아니면 그때와 똑같이 딱 그 정도의 미소로만 대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카리아 사신하고 밥 한 번 먹은 다음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모습도 사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코린은 게로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화를 내지 않고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하러 힘들게 왔을 텐데, 어떻게든 도와주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코린이 물었다. “오스틴을 지원하든 스칼하븐을 지원하든, 이카리아는 선택하는 순간 선택하지 않은 나라에 의해 하루면 망할 텐데요.”


“이카리아를 점령하는 나라는 우리 코 앞에 본격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우리를 침략할 수 있게 돼. 그러니 이카리아가 넘어가게 그냥 둘 수도 없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게로스가 말했다. 그가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궁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국경부터 열고, 이카리아에 압박을 멈추도록 오스틴을 설득해 봐야겠어. 마르벤이 열리면, 저 이상한 사신들하고 왕자도 도로 집에 보내 버리고.”


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로스는 저렇게 짜증을 내도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동갑인 왕을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존경하고 있었다. 코린은 오스틴 대사에게 회동을 요청하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0살 게로스 왕자가 왕립학교 회랑에서 포플러나무를 바라보는 모습


이틀 후 새벽, 세르비카 서기관을 실은 마차가 슐로스 루와얄에서 비밀리에 출발했다. 레이첵은 파렌베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브레스부르로 돌아가야 하는 피곤한 역할을 자청해서 맡았다. 대신, 왕과의 회동 같은 중요한 기록은 레이가 대신해 주기로 했다.


이카리아 사신단이 묵는 귀빈용 별관인 뤼미에르관은 왕궁 후면과 중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게로스의 거처에서도 내려다보이는 이 별관은 외국의 왕족 등 국빈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3미터나 되는 담과 그 담조차 밖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망루 위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뤼미에르관의 안팎을 감시하고 있었다.


레이첵은 처음에 뤼미에르관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커튼 안 치면 방에서 옷도 못 갈아입겠네요.”


세라비와 레이, 레이첵은 각각 침실과 작은 개인 응접실이 딸린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세라비는 이층에 있는 자기 방 테라스에서 뤼미에르관의 정원과 담 그리고 망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야, 방은 화려한데 감옥이네.’


게로스는 반나절 동안 포르 칼레즈와 비텔 외곽에 새로 배치한 부대와 보급품 창고에 대한 회의에 잡혀 있다가,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이카리아 대사 두 분께서 어떻게 지내시나 하고 뤼미에르관에 들러 보았다.


별관의 정원에는 커다랗게 우거진 너도밤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사이에 코스모스와 풍접초가 활짝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는 구름이 가늘게 퍼져 있고, 따뜻한 가을볕 아래 오래된 흰 석조 벤치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게로스는 오랜만에 보는 한적한 풍경을 잠시 멈춰서 바라보다가, 정원 안쪽의 나무 사이에서 뭔가 후다닥 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 보았다.


세르비카 대사가 나무에서 뭔가 급히 걷어내고 있었다. 대사님들께 일인당 두 명씩 붙여놓은 경호원들 중 한 명이 반대쪽 나무에서 둘둘 묶인 천의 매듭을 급히 풀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게로스가 오는 것을 보고 “빨리요 빨리”하며 재촉하고 있었다.


‘대체 뭣들을 하는 거지…’ 게로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르비카 대사를 바라보았다. ‘벽 타고 올라온 순간부터 계속 정신없게 하는군.’


그것은 세라비가 나무에 걸어 놨다가 게로스가 오는 것을 보고 급히 걷어내고 있던 해먹이었다.


세라비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정원의 잘 안 보이는 구석에 해먹을 치고 잠시 낮잠을 자려고 했다가, 게로스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매듭을 푸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게로스는 어이없는 눈길로 그 꼴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대사님, 잠자리가 불편하신가요?”


세라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인사말을 틀렸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아닙니다… 아주 편합니다…”


게로스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세라비는 덧붙였다. “편합니다… 이제까지 자 본 그 어느 곳보다도…”


게로스는 세르비카 대사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겨우 참았다. ‘이 사람은 거짓말은 못 하는군. 그래도 너무 놀리면 실례니까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편히 쉬고 계신지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브리엘 부대사님도 잘 쉬고 계신가요?”


“아마도요… 잘 있을 겁니다.” 아침 같이 먹은 후로는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아서 뭐 하는지도 모르면서 세라비는 대답했다.


게로스는 뤼미에르관을 떠나며 생각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이렇게 활짝 열린 곳에서 어떻게 잠을 잘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이렇게 다 보이는 곳에서 자면 자객이 활이나 석궁을 쏠 수도 있는데…’


Garden.png 가을 햇살 아래 정돈된 별관 정원. 생울타리와 흰 석조 벤치가 고요한 오후를 만든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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