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옆에 눈치 백 단 사신 한 명 더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잠시 후 세라비는 자기 방 응접실에서 게로스와 마주 앉아 있었다.
세라비는 여기 와서 게로스를 네 번째 보는 거였지만, 한 번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반면 세라비는 하녀가 급히 옷도 고르고 머리도 해 주었지만 여전히 뭔가 어색하고 어쩐지 초라하고 어딘지 추레했다.
‘응접실에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다.’ 세라비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랑 같이 비치면, 나 진짜 못생겨 보일 거야.’
게로스가 수행원들을 모두 문 밖으로 물러가게 했기 때문에, 세라비는 말 그대로 응접실 안에서 게로스와 단 둘이 독대 중이었다. 세라비는 너무너무 무서워서 땀이 배인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계속 닦았다.
게로스는 테라스에서 세라비를 처음 만난 그 순간과 똑같이 온화하고 무서운 미소를 지은 채 세라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라비가 침착한 척하면서 손의 땀을 닦는 것까지 모조리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세라비가 나무에 해먹을 달다가 걸린 것부터 담을 넘어 별관으로 돌아오는 모습까지 반복 재생 중이었다.
‘세르비카 경이 아무나 밀사로 보낼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다.’ 게로스는 전날 밤 경비대장이 돌아간 후 서재에 늦게까지 앉아 생각했다. ‘역시 특수훈련을 받은 자였어. 자객 출신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몰래 나갔다 왔을까?’
‘세르비카 경의 조카라고 해서 반드시 믿을 만하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이미 오스틴이나 스칼하븐 쪽과 결탁했을 수도 있어. 세르비카 경은 그것을 모른 상태로 조카를 보냈겠지. 아니면 세르비카 경도 이미 포섭되었을 수도 있다.’
‘해먹을 건 것도 외부의 적이 볼 수 있게 표시를 한 것일 수도… 그런 다음 담을 넘어 접선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게로스는 세르비카 대사가 더 이상 닦을 땀도 없는 손바닥을 계속해서 문지르는 것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가 친절한 말투로 물었다.
“대사님, 잘 쉬셨습니까? 제가 어제는 쉬시는데 그만 방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세라비는 ‘의젓하게! 당당하게! 쫄지 말자!’하고 속으로 백 번째 외치는 중이었다.
“폐하의 배려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세라비가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바깥 상황이 불안하다 보니 제가 대사님께 왕궁 안을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네요. 플로르 왕자님이 도착하시면 같이 모시고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세라비는 품위 있(다고 생각되는 태도로)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별 대단한 얘기 하러 온 건 아니네. 난 또 해먹 얘기 하러 온 줄 알았지.’
“그런데 대사님은 별관이 불편하십니까?” 안심하고 있는 세라비에게 게로스가 갑자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세라비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폐하의 배려 덕분에…(아 이 말은 아까 했지…) 아무튼 정말 좋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별관의 정원 출입문은 별로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게로스가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말했다. “불편하시면 대사님 전용 출입문을 하나 더 뚫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문도 매우 좋습니다.” 세라비는 갑자기 웬 문 타령인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거기로 안 다니십니까?”
세라비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람, 내가 어제 담 넘는 걸 봤구나!’
세라비가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상냥하게 웃고 있던 게로스의 표정이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세라비는 너무 무서워서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말씀 못 하실 이유가 있으신가요?” 게로스가 다시 물었다.
세라비는 생각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해 봐야 소용없겠구나…!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뭐 죄 지었어? 나가서 뭘 훔친 것도 아니고 부순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세라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게로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출입문이 있는데도 담을 넘으면, 나가는 걸 누군가에게 보이면 안 되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세라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를 첩자로 의심하는구나…! 이 사람은 내가 여기서 말 잘못하면 진짜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일단 살아야겠다.’
“폐하,” 세라비는 용감하게 말을 꺼냈다. “어제저녁에 날씨가 너무 좋아서, 담을 넘어서 나갔다 왔습니다.”
게로스는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지 않은 채로 물었다. “출입문으로도 나갈 수 있는데 굳이 담을 넘어서요?”
“경호원이 두 분이나 붙어 있어서, 아, 오늘부터는 세 분이 되었습니다만… 아무튼 거추장스러워서 혼자 다녀왔습니다. 혼자서는 못 나가게 하더라구요. 왕궁 건물 안에는 안 들어갔고, 정원 좀 보고 그다음엔 분수랑 그 옆에 나무숲하고…”
‘많이도 다녔네.’ 세라비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게로스는 생각했다. ‘그냥 진짜 답답해서 나간 거 같은데… 너무 몰아붙였나?’
“담을 너무 능숙하게 잘 넘으시던데, 이카리아에서 특수훈련을 받으셨나요?” 게로스는 마지막 의심 한 조각을 담아 다시 물었다.
“그건… 제가 담을 좀 잘 넘는 편입니다.”
“담을 잘 넘는 편이라고요? 보통은 문이 있으면 문으로 다니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담을 넘어 다닌다고요?”
어쩌다 보니 세라비는 이카레이유의 세르비카 저택에서 자기가 담을 얼마나 많이 넘어 다녔는지까지 게로스에게 실토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기 와서 절대로 수상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라비는 최대한 당당하려고 노력하며 말을 맺었다. “또한 뭔가 부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던 게로스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러나 밖으로 보이는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으므로 세라비는 속으로 울고 싶었다.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게 낫겠다…’
게로스는 불안해서 터질 것 같은 표정인 주제에 필사적으로 침착한 척하는 세라비의 얼굴을 보고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평소에 짓는 외교 미소 대신 조금 더 부드럽게 웃으며 세라비에게 말했다.
“대사님, 왕궁에 더 좋은 곳들이 많은데, 한번 둘러보러 가시겠습니까?”
세라비가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대답도 못하고 있자, 게로스는 상냥한 말투로 덧붙였다. “플로르 왕자님이 오시면 어딜 모시고 갈지 미리 봐 두셔도 좋지 않을까요?”
세라비는 아 그런 건 미리 봐 둬야죠! 하고 대답했다. 게로스는 오후에 시종을 보내겠다고 말하고 세라비의 응접실에서 나갔다.
게로스 왕이 떠나자, 세라비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서 응접실의 소파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세라비 님,” 어느새 들어왔는지 레이가 응접실에 서 있었다. “어떠셨어요?”
“괴물하고 싸울 때보다 더 무서웠어…” 세라비는 레이가 내민 손수건에 얼굴에 배인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건 알고요, 폐하가 뭐래요?”
“플로르 왕자님 오시면 어디 좋아하실지 미리 왕궁 한번 둘러보자고 하셨어.”
레이는 ‘오호?’하고 생각했다. “폐하하고 세라비 님하고 단 둘이서요?”
“그럴 리가 있겠어? 뒤에 달고 다니는 수행원만 대여섯 명 되던데. 너도 같이 가자. 왕자님 오시면 어디 모시고 다닐지 동선도 봐 두게.”
‘플로르 왕자님은 국경 닫히기 전에 파렌베르크에 최소 열 번은 왔을 텐데 퍽도 그거 때문에 불렀겠다, 으이구.’ 레이는 기운이 빠져 소파에 얼굴을 묻고 푹 쓰러져 있는 세라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게로스가 세라비 님 혼자 데리고 궁 안을 돌아다니면 금방 여기저기 소문날 텐데… 어쩌려고 그러지?’
레이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 왕의 시종이 세라비의 방 문을 두드렸다. 시종은 폐하께서 두 분 대사님들을 왕궁 산책에 초대하신다며 참석 의향을 물었다. 레이는 그러겠다고 하고 시종을 돌려보낸 후, 소파에 엎어져 있는 세라비를 일으켜 세웠다.
“아 왜?”
“일어나요, 빨리…” 레이는 세라비를 방으로 들이밀면서 말했다. “옷 다른 거 또 뭐 있어요?”
“아니 왜 네가 더 난리야? 네가 다른 거 입으래서 지금도 다른 옷 입었잖아! 내가 뭐 어디 파티 나가냐?”
“세라비 님, 이건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예요.” 레이는 세라비의 두 팔을 붙잡고 엄숙하게 말했다. “세라비 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에요. 세라비 님이 어떻게 입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 이카리아의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가 달라지는 순간인데, 아무렇게나 하고 나가실 거예요?”
세라비는 그렇게까지 엄청난 자리인 줄 몰랐기 때문에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레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하녀 불러서 옷이랑 머리장식 더 갖다 달라고 하시구요. 옷 밝은 색 없어요? 코트는 조금 쌀랑하다 싶은 걸로…”
“왜 춥게 입어?” 세라비가 물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좀.” 레이가 세라비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세라비는 아 왜저래 진짜! 하면서 하녀를 부르러 갔다.
오스틴 대사와의 회동 약속이 잡혔음을 보고하러 게로스의 집무실을 방문한 코린은 난데없이 오후에 같이 바람이나 쐬자는 게로스의 말에 당황하여 눈만 껌뻑였다.
“바람을 쐬다니, 어디 외부에 나가시려고요?”
“밖은 아니고, 성 안에서. 이카리아 대사들하고 약속을 잡았거든.” 게로스가 대답했다. “일이 좀 있었어.”
“일이라니요?”
“어젯밤에 세르비카 대사가 담을 넘는 걸 봤거든.”
코린은 경악했다. “세르비카 대사님이, 담을 넘어요? 뤼미에르관 담 말씀이십니까? 높이가 꽤 될 텐데요.”
“잘 넘더라고.” 게로스는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마치, 동물로 치면…”
게로스는 여러 가지 동물을 떠올렸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어서 머뭇거렸다. 코린은 “그거 엄청 수상한 거 아닙니까!”하고 외쳤다.
“그래서 내가 오늘 아침에 세르비카 대사를 찾아가서 몇 가지 좀 물어봤지.”
“그래서 수상한 점은 발견하셨습니까?”
“아니, 그냥 답답해서 나갔다 온 거였어.”
“문 놔두고, 담을 넘어서 말입니까?”
“뭐, 그렇게 됐어.” 코린이 자신과 생각하는 패턴이 똑같은 것을 보고 쿡쿡 웃으며 게로스가 말했다. “세르비카 대사가 완전 겁을 먹었길래, 사과도 하고 기분도 좀 풀어줄 겸 나오라고 했지.”
코린은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설명을 끝내 버리는 게로스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가 확인해서 이상한 점이 없었다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코린은 바람 쐬러 갈 장소들을 대충 머리에 떠올리며 준비하러 나가려다, 마지막으로 게로스에게 하나 더 물었다.
“설마 세르비카 대사님만 데리고 다니실 건 아니시죠?”
“세르비카 대사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잖아.” 게로스가 대답했다. “당연히 브리엘 부대사도 같이 불렀지.”
코린은 이 말에 안심하는 자신이 왠지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한편, 레이는 자기 방에서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레이는 거울을 볼 때마다 대부분 만족스럽긴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만족스러움이었다.
파렌베르크에 도착해서 수정 테라스에 올라 게로스 왕과 마주했던 그날, 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와…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네.’
레이는 게로스 왕의 뚜렷한 콧대와 균형이 잘 잡힌 얼굴선, 차분하고 부드러운 눈매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사람이 여유 있는 태도로 자신들의 정체를 순식간에 간파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옆에 있던 세라비가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바람에 정신을 가다듬고 친절한 환영에 대한 화답을 했지만 말이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게로스가 세라비의 노인네 옷(아마도 제일 편해 보여서 갖다 입었을 거라고 레이는 생각했다)을 비꼬는 동안 레이는 게로스를 천천히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와, 저걸 돌려까네, 재수 없다.’
‘그 와중에 표정관리는 진짜 빡세게 하네. 저 외모도, 왕이니까 아침저녁으로 공들여 꾸민 거잖아? 난 저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한데. 매력은 아무래도 내가 더 많지.’
전날, 게로스가 별관에 들렀다가 해먹 매듭 푸느라 부산을 떠는 세라비한테 한마디 하고 가는 것을 3층의 자기 방에서 목격했던 레이는, 오늘 아침 게로스가 세라비를 독대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입에 빵을 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
‘내 눈은 못 속인다.’ 수없이 많은 연애와 셀 수 없이 많은 연애상담으로 몽켈리에의 전설이라 불렸던 레이는 확신했다. ‘그 사람, 그렇게 생긴 주제에 아직 여자 손도 못 잡아본 게 틀림없어. 어차피 결혼은 정략결혼밖에 생각 안 해봤을 테니 오는 여자마다 다 철벽 쳤나 보네. 아휴… 그 얼굴 갖고 왜 그러고 살지.’
옆방에서 세라비와 하녀가 뭐라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레이는 후훗, 하고 웃었다.
‘저런 타입이 세라비 님처럼 허술한 여자한테는 무방비하게 빠지지. 둘 다 둔탱이 같으니 옆에서 뭐라도 해줘야지 안 되겠네. 휴… 이젠 이런 짓 안 하고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더니…’
레이는 거울에 비친, 오늘따라 게로스보다 더 잘 생겨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스윽 바라보며 쉬드르 신의 계시를 받던 그날을 떠올렸다.
‘세라비 님이 왕비가 되면, 나는 왕비의 측근으로서 칼베르의 왕실 마법사가 되겠지? 스승님, 제가 드디어 스승님의 뒤를 잇게 되었어요…’
이윽고, 왕의 시종이 두 사람을 부르러 뤼미에르관 입구로 왔다. 레이는 옆방으로 세라비가 어떻게 차려입었나 보러 갔다. 불편한데 꼭 이렇게 입어야 되냐고 투덜거리는 세라비를 어르고 달래며 레이는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