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여우 같은 브리엘 부대사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게로스는 세라비에게 왕궁 안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긴 했지만, 이카리아에서 온 밀사를 사람들이 많은 곳에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게로스와 코린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궁에 드나드는 외부인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이카리아 대사들을 안내했다.
그래서 레이는 궁에 온 손님들이 반드시 구경하러 가는 왕궁 전면부의 사계절의 이름을 붙인 네 개의 정원들과 수호신들의 이름을 각각 딴 세 개의 분수 등은 볼 기회가 없었다. 세라비는 담 넘었을 때 이미 다 보고 와서 상관없다고 했다.
게로스와 코린, 세라비와 레이는 돔 모양의 유리 천장이 있는 온실을 돌아본 다음, 측면부의 산책로를 거쳐 별궁으로 향했다. 세라비는 플로르 왕자님이 오시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고 어디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실지를 너무 깊이 생각하느라고 옆에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는 게로스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한편, 손님들을 안내할 동선을 짠 장본인이자, 손님들을 직접 안내하고 설명도 해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코린은 브리엘 부대사가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칼베르의 계절별 행사와 지역별 특산물, 그리고 양국의 마법사 인적자원 교류 등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질문을 해 대는 통에 일일이 대답해 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코린이 정신을 차려 보니 게로스가 세라비에게 길을 안내하며 앞장서 가고 있고 코린과 레이는 그 뒤를 멀찍이서 따라가고 있었다.
코린은 게로스의 친구이기도 했지만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대신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어느 여성도 게로스에게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내정 문제는 물론이고 국제 문제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심지어 오스틴과 스칼하븐은 그 명분을 갖고 전쟁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불여우 같은 브리엘 부대사는 이런 민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궁 구경을 빌미 삼아 자신의 주의를 딴 데로 돌려놓고 세르비카 대사를 폐하에게 일부러 접근시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코린은 현명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이런 무엄한 시도에 화가 치밀어 브리엘 부대사에게 엄중하게 말했다.
“부대사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브리엘 부대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일부러 질문을 많이 하셔서 폐하께 세르비카 대사님을 접근시키시는 거라면 포기하십시오. 우리 폐하가 10대 때부터 이런 식으로 접근을 시도한 여성분들이 몇 명이나 되었을 것 같습니까?”
브리엘 부대사는 얼굴에 깊은 비탄의 빛을 띠고 코린을 바라보았다. “코린 경, 저는 경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세상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코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브리엘 부대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세르비카 대사님은 제 상관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런 명예로운 자리에서도 폐하 옆에서 안내를 받는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제가 사신단의 대표였다면 제가 그 대우를 받았을 거구요. 플로르 왕자님께서 도착하시면 왕자님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셨을 겁니다. 경께서는 지금 세르비카 대사님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외교관으로서 응당 받아야 하는 의전 행위에서 차별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코린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닙니다. 세르비카 대사님은 당연히 예우받으셔야죠.”
“폐하를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경의 충성심은 저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저도 경처럼 제 상관이신 세르비카 대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레이는 저만치 앞에서 게로스 옆을 걸어가는 세라비의 뒷모습을 향해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희 세르비카 대사님은 이카리아의 명문학교를 졸업하신 최고 엘리트로써(무슨 학교를 다녔는지도 몰랐다) 젊은 나이에 외교관이 되셔서(백수였다) 게로스 폐하처럼 일만 하고 사신 분입니다. 나랏일만 하고 사시느라 다른 사람들과 따뜻한 대화 한 번 섞어 보지도 못하신 두 분께서 시국을 걱정하며 저렇게 긴 환담을 나누고 계시는 것을 보니 우리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우호가 앞으로 얼마나 돈독해 질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코린 경!”
코린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브리엘 부대사와는 도착한 첫날 식사 한 번 해본 게 다였기 때문에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브리엘 부대사는 그러나 이번에는 약간 정색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경께 좀 서운합니다. 경께서는 지금 제가 경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는 진심 어린 마음을 의도적인 작전으로 취급하시는 건가요? 저는 경께서 정말 박식하시고 지적이셔서 우리 두 나라의 문화적 사회적 교류를 위해 큰 도움을 주실 것으로 믿고 여러 가지 여쭈어 본 건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다니, 솔직히 마음이 아프네요.”
코린은 깜짝 놀라 두 팔을 저으며 아니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동계 축제 얘기하는 중이었나요?”
이렇게 해서, 코린은 게로스가 세라비에게 왕궁 안내를 하는 동안 거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네 사람은 이윽고 별궁 안에 있는, 벽 하나가 통창으로 되어 있어 슐로스 루와얄의 네 개의 정원이 환히 내다보이는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전망이 정말 좋네요!” 세라비가 감탄하며 말했다. “책도 많고… 폐하도 여기 오셔서 책을 읽으시나요?”
“저는 제 개인 서재가 따로 있긴 한데, 책은 여기가 더 많아서 여기도 가끔 옵니다.” 게로스가 대답했다. “대사님은 어떤 책을 주로 보시나요?”
“전 여행기를 주로 봅니다. 모험 소설하고 고대문명 발굴사 같은 것도 가끔 보고요.”
세라비는 책을 다양하게 보는 편은 아니어서 ‘내가 또 뭘 읽지…?’하고 잠시 생각했다. “농업 기술서도 가끔 봅니다.”
“농업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게로스가 물었다.
“저희 마을이 아무래도 농촌이다 보니…” 세라비가 대답했다. 코린은 ‘웬 농촌? 외교관이니까 이카레이유에 사는 거 아니었어?’하고 생각했다.
“고향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세르비카 대사님의 마음이 정말 고귀하십니다.” 레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맨날 국제 정세나 각국의 정치사 같은 것만 읽고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희 세르비카 대사님은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코린은 왠지 피로해져서 게로스가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에서 농업 기술서를 찾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왕궁 도서관이라도 농업 기술서는 몇 권 안 되었으므로 게로스는 좀 찾다가 포기했다.
“혹시 관심 있으신 장소가 있으신가요, 세르비카 대사님?” 게로스가 물었다.
“음… 검술 훈련장 같은 것도 있나요?”
코린은 ‘대사가 군사훈련에 관심이 많은 건가!’하고 경계의 눈길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게로스는 코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경비대 훈련장 말고, 내 개인 훈련장으로 가지.”하고 말했다.
왕의 개인 검술 훈련장은 라그랑쥬 수련관의 대전장만큼 크고 시설도 좋았다. 왕의 검술 교관과 근위 훈련관이 체력단련실에 있다가 뛰어나와 정중히 인사했다.
세라비가 체력단련실의 기구들과 검술훈련장의 훈련더미 등을 보면서 왠지 들떠 있는 것 같아 게로스는 ‘이런 걸 보고 왜 저렇게 좋아하지? 역시 특수훈련을 받았나…?’하고 생각했다. 세라비는 훈련장이 마음에 들어서 뭐라도 하나 휘둘러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레이의 말을 듣고 한껏 차려입고 나온지라 옷이 불편해서 아무 짓도 안 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여기는 자주 오시나요?” 세라비가 드릉드릉한 손을 등 뒤로 감추며 게로스에게 물었다.
“매일 옵니다.” 게로스가 대답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요.”
“일어나면 바로 여길 오신다고요?” 세라비가 놀라서 물었다. “왜요?”
“그야… 아침이니까요.”
‘하루 종일 일정도 많아 보이던데, 아침부터 왜 자신을 학대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지?’ 세라비는 생각했다. ‘왕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왠지 백수인 내 처지가 더 나을지도…’
세라비는 아침마다 게로스가 저 근육이 산더미 같은 교관들과 뭔가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을 상상했다. 혹시 검술 시범 같은 거라도 안 보여주려나, 하고 살짝 기대하며 게로스를 쳐다보았지만, 게로스는 교관들하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제 다른 데로 가자고 했다.
세라비는 실망했다. ‘잘생긴 남자가 검술 하는 멋진 광경 좀 보게 되나 했더니… 쳇.’
게로스는 세르비카 대사가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훈련장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 하고 생각했다. 아까 도서관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니 전망이 좋은 곳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게로스는 원래 가려던 곳은 아니었지만 동쪽 성벽의 파빌리온으로 가기로 했다.
코린도 파빌리온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게로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로써 생각할 게 많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외부 손님에게 이곳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쪽 성벽의 파빌리온은 원래 파빌리온 오로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해 뜨는 쪽을 향해 있어 새벽에 가장 먼저 빛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부모가 돌아가신 후로는 이곳에 오는 사람은 왕궁 안에서 게로스 혼자였으므로 뭐라고 불리던 상관없었다.
코린도 몇 번 게로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는 고작 삼 일 전에 처음 만난 이카리아 대사들이 뭐라고 여기까지 보여주나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로스와 세라비가 먼저 계단을 오르고 코린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갑자기 레이가 가쁜 숨소리를 냈다. 코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브리엘 부대사가 창백한 얼굴로 계단의 돌 난간을 잡고 있었다.
“아니, 대사님!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코린이 깜짝 놀라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아… 전 높은 곳에 올라가면 좀 어지러워서…” 브리엘 부대사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수행원 하나가 달려와 부대사를 부축했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코린이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레이는 수행원의 팔을 뿌리치고 코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 있으면 괜찮습니다. 마침 그늘이고… 코린 경, 저 좀 부축해 주세요…”
코린은 ‘아까 별궁에서 탑에도 올라가 놓고 뭔 소리지?’하고 생각하며 레이를 부축했다.
‘설마 브리엘 부대사… 나를 좋아하나?’ 코린은 오늘 하루 동안 레이가 보인 행동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설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푸른색 둥근 지붕 아래 하얀 기둥에 오래된 석조 벤치가 놓인 파빌리온에서 바라보는 파렌베르크는 아래에서 볼 때보다 더욱 아름답고 청명했다. 청회색 기와의 지붕들이 골목마다 이어지는 사이사이로 오래된 첨탑들과 돔 지붕들이 조용히 솟아 있었다. 신전인지 관공서인지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공기 중에 울려 퍼져 파빌리온까지 스며들어 왔다. 항상 보던 정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로스는 파렌베르크가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저긴 바다일까요?” 세라비는 쿠젤 강이 지평선과 맞닿은 곳에 왠지 푸른 띠가 보이는 것 같아 이렇게 물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바다는 너무 멀어서 여기서는 안 보일 겁니다.” 게로스가 말했다. “이카레이유는 바다가 가깝죠?”
“네, 이카레이유는 바닷가에 있어서 해변도 있고 항구도 있어요.”
“파렌베르크는 내륙이라 바다가 좀 멉니다. 바다를 좋아하시나요?”
세라비는 ‘내가 바다를 좋아했던가?’하고 잠시 생각했다. “저는 강가에서 살아서 바다를 자주 보지는 못해요. 그러고 보니 산 넘고 강 타고 오느라 바다 본 지는 좀 오래되긴 했네요.”
게로스는 파렌베르크와 가까운 곳에 있는 괜찮은 바닷가들을 떠올려 보았다. 도브론? 에트레타? 아니면 롱플레르? 요새 좀 바빴는데, 하루쯤 바닷가에 놀러 가 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요새 내가 좀 지쳤나…?’
게로스는 이후의 이런저런 일정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내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 오스틴 대사와의 회동도 있었다. 바닷가는 무슨 바닷가람… 하고 게로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바람 너무 시원하고 좋네요!”하고 세라비가 파렌베르크 시내 정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파빌리온을 향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긴 갈색 머리가 물결치듯 흩날렸다.
‘그래… 지금은 일단 생각하지 말자.’
게로스는 바람이 정말로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세라비의 눈길을 따라 도시를 바라보았다.
계단 아래에서는 여전히 레이가 코린에게 자기가 어쩌다가 높은 곳을 무서워하게 되었는지 설명 중이었다. “제가 원래는 높은 데 올라가도 괜찮았었는데 학교 다닐 때 탑에 올라갔다가 한 번 숨이 차서 기절한 다음부터는…”
‘난 결혼해서 아내도 있는데, 설마 아니겠지?’ 코린은 레이가 붙들고 있는 팔을 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파빌리온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동안, 나머지 두 사람은 계단 밑에서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