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담을 넘는 그림자

휘리릭 훌쩍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4년 전, 왕비 후보로 거론되던 레모르스 공작의 딸은 공작저의 자기 침실에서 암살되었다. 칼베르에서 본국으로 귀국하던 스칼하븐 사신단을 실은 배가 수장되고,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번갈아 가면서 서로 보복을 하다가 대놓고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게로스는 파렌베르크 왕립 학교 2년 선배였던 엘로이즈 레모르스 양을 얼핏 기억하고 있었다. 공작의 딸이었으므로 왕궁에서 열린 연회나 무도회 등에도 자주 얼굴을 비쳤지만 게로스는 그녀가 왕비 후보로 이름이 거론되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


왕립 학교 시절, 학교의 모든 여학생들은 게로스를 동경과 사모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감히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는 못했다. 게로스는 그들과 의례적인 말 이외에는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그는 왕자였지만, ‘파렌베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바람둥이’의 아들이기도 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게로스는 다음 왕위 계승자인 어머니가 궁에서 나가 버리는 바람에 책임이 뭔지도 모르는 십 대 소년일 때부터 왕이 갖추어야 할 책임, 의무, 도덕성, 기타 등등 왕의 덕목을 교육받았다. 강하고 훌륭했던 선대왕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겨우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다.


게로스가 왕이 되자, 할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신하들과 귀족들은 그에게도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선대왕의 강력한 왕권에 눌려 기를 못 펴던 귀족들과 심지어 할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일부 신하들조차 너무 젊은 왕을 우습게 본 모양인지, 슬슬 그를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게로스의 명령을 일부러 질질 끌며 늦게 처리하거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반대하거나, 자기들끼리 결정 다 해 놓고 와서 게로스에게 받아들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파렌베르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의 영주들은 왕에게 보고도 없이 맘대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선대왕이 손자를 걱정하여 단단하게 다져 놓은 왕권은 빠르게 허물어져 갔다.


게로스는 왕의 자리가 그냥 왕관을 쓰고 앉아만 있는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 할아버지가 그토록 모든 일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계산해 가면서 수행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충성하던 귀족들을 더욱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말 안 듣는 대신들과 귀족들은 회유하거나, 불이익을 주거나, 협박하거나, 정도가 심할 때는 불복종을 이유로 처벌했다. 외국과 내통해서 이권을 빼돌리려고 시도한 신하는 주저하지 않고 처형했다. 귀족들과 신하들은 겨우 스물을 넘긴 이쁘장하게 생긴 왕이 온화하게 웃고 있다가도 필요할 땐 잔혹하게 돌변하는 것을 몇 번 보고 나서는 그를 더 이상 시험하지 않았다.


지방의 영주들은 파렌베르크에서 내려온 왕명을 제때 수행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외국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뭉쳐서 게로스에게 반항하려고 하였으나, 자기 영지에 게로스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나타나 영지민들에게 손 한 번 흔들어주면 민심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는, 도리어 우리 영지에 한 번만 납셔 달라고 파렌베르크에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즉위 3년, 겨우 스물세 살의 젊은 왕 게로스의 왕권은 이미 할아버지보다 더 강력했다.


내부 정리가 대충 끝나자 이제 왕실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비를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오스틴과 스칼하븐 사이에는 이미 분쟁이 전쟁으로 격화되고 있었으나 게로스는 그들의 눈치를 볼 생각은 없었다. 레모르스 양은 공작의 딸이었고, 외모, 인성, 지적 수준, 건강 모두 평균 이상으로 게로스도 특별히 이의가 없었다. 게로스는 어차피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애초에 왕비를 맞이하는 조건에 개인적인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귀족 여성들은 모두 게로스를 사모했고 게로스가 왕비로 맞겠다고 하면 약혼자가 있어도 모두 버리고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레모르스 공작의 딸을 비롯한 귀족 여성들이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그 레모르스 양이 어느 날 저녁 자기 집에서 살해되었다. 범인은 누군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저 근처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정체 모를 자들이 보였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게로스는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벌이는 전쟁이 그냥 잘생긴 칼베르 왕의 왕비 자리를 노리는 치정극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경고였다. 너희는 너희 왕비 자리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였다. 게로스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영토도 넓지만 군사력은 약한 칼베르가 얼마나 대외적으로 무력한 위치에 있는지 절감했다. 칼베르는 그들에게 있어서 주권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둘 중 이기는 나라가 가지도록 되어 있는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게로스는 승자에게 주어지는 트로피였다.


슐로스 루와얄은 여전히 잘 생긴 임금님이 계시는 아름다운 궁전이었지만, 그날 이후 철통 같은 경비로 무장되었다. 게로스는 요새 같은 왕궁 안에서 경호원과 시종과 신하만 여덟 명이나 데리고 다녔고 베개 옆에는 단검을 두고 잤다. 공작의 딸이 안전한 공작저의 자기 침실에서 살해되었다는 것은 게로스도 완전히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게로스는 아무리 날씨가 화창해도 모든 공간이 뚫려 있는 야외에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밀사의 신분이면서 해먹을 치고 잘 생각을 하는 저 이카리아 대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은 날씨가 진짜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뤼미에르관 밖에는 정보국장 코린과 외교국장 세드릭 발루아가 게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드릭은 티르윈에 출장을 다녀오느라 이카리아 대사들을 아직 만나지 못했으므로 이제 뤼미에르관에 들어가려는 중이었다. 게로스는 세드릭에게 이카리아 대사들은 지금 바쁘니 나중에 가라고 했다.


“바쁘시다고요?” 세드릭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무래도 바쁘겠지. 날씨도 좋으니까.” 게로스는 정원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코스모스와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석조 벤치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세드릭은 알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게로스는 자기 방 테라스에서 중정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쌀쌀해지려고 하는 맑은 가을밤이었다. 하현달이 되어 가는 카마가 동쪽 하늘에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중정 너머로 이카리아 사신들이 묵고 있는 뤼미에르관이 보였다. 방 하나에만 불이 켜져 있고 나머지 방들은 다 어두웠다. 게로스가 눈을 돌리려는 순간, 뤼미에르관을 둘러싼 담벼락 밑에 무엇인가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게로스는 숨을 들이켰다. 그림자는 담을 둘러싼 나무숲 사이로 민첩하게 움직이더니, 담 바로 아래에 가지를 드리운 나무에 뛰어올라 발판 삼아 딛고 3미터나 되는 담 위로 훌쩍 올라갔다. 살쾡이처럼 재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그림자는 담 안쪽으로 가볍게 뛰어내리더니 별관 정원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어두웠던 별관 방 하나에 불이 켜졌다.


게로스는 홀린 듯이 그 그림자의 유연하고 긴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궁정 경비대장을 급히 호출했다.


“뤼미에르관 경비 인원 두 배로 늘려.” 게로스는 별관 쪽을 여전히 응시하며 명령했다. “세르비카 대사에겐 호위 한 명 더 붙이고.”

뤼미에르관-지붕수정-게로스-night 복사-1.png 게로스가 자기 방 테라스에서 뤼미에르관을 내려다보는 모습. 달빛 아래 담을 넘는 그림자가 보인다. ⓒ Mabon / AI


다음날 아침, 세라비는 아침밥도 다 안 먹었는데 갑자기 게로스 왕이 지금 여기로 오는 중이라는 시종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여기로 오신다고요? 왜요? 그럼 어디서 뵐까요? 제 방이요 아니면 레… 아니 브리엘 부대사님 방이요?”


시종은 약간 난처해 보였다. “폐하께서는 대사님과 독대를 청하십니다.”


레이는 입에 빵을 물고 팔짱을 낀 채 세라비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세라비는 뤼미에르관의 하인에게 자기 방 응접실 좀 빨리 청소해 달라고 다급히 부탁하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달려갔다.


레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올 것이 왔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세라비 님.”


“왜?”


“그때 그 헐렁한 옷 말고 다른 거 입어요.”


“그게 어때서?”


“아무튼 다른 거 입어요. 모르겠으면 하녀한테 좀 이쁜 걸로 골라달라고 해요.”


세라비는 뭔지도 모르고 알았다며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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