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세르비카 대사와 에클레르

줄 서서 사온 겁니다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오스틴 대사 일행이 돌아간 후, 세드릭과 코린도 각자 왕궁 맞은편의 미니스트렐 행정관구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게로스는 자기 서재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브래넌 퀸시가 때리고 간 것도 아닌데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피곤했다.


창밖에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며 해도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게로스는 저녁식사도 생각이 없어 물리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왕궁의 상아색 벽이 노을을 반사하여 빨갛게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 켜는 시종이 들어와 방마다 불을 켜고 갔다. 날씨가 아직은 따뜻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왠지 추운 것 같아서 게로스는 시종에게 벽난로에 불을 좀 더 넣도록 했다.


테라스를 통해 중정과 그 너머 별관을 바라보던 게로스는 뤼미에르관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오늘 회담의 결과를 이카리아 대사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오스틴 대사들을 만나게 된 것도 이카리아에서 도와달라고 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드릭이 다음날 아침에 문서로 정리해서 뤼미에르관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지금 게로스가 굳이 직접 가서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빨리 가서 얘기해 줄 만한 좋은 결과도 없지 않은가? 브래넌이 민간인 차원의 교류 정도는 본국에 얘기해 보겠다고 했지만 기대할 가치도 없었다. 뭐 좋은 얘기라고 이 저녁에 굳이 찾아가서 얘기를 해줄까, 어차피 내일 세드릭이 가서 좋게좋게 말해줄 텐데.


게로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시종을 불렀다.




저녁을 일찍 먹고 자기 방 응접실의 소파에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뒹굴거리고 있던 세라비는 왕의 시종이 와서 폐하께서 지금 여기로 오고 계신다고 알리는 바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이 시간에? 왜요?”


세라비는 허둥지둥 일어나 아래층에 대기 중인 하녀를 불러 응접실 좀 치워달라고 하고는, 자기도 마음이 급해 과자가 든 종이봉투를 구석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는 부서진 과자로 인해 응접실 구석이 가루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더욱더 놀라 바닥에 꿇어앉아 손으로 가루를 마구 쓸어 담았다. 하녀가 “제가 할게요!”하며 달려왔다.


세라비는 위층에 있는 레이의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며 “레이! 어떡해! 나 뭐 입어!”하고 소리쳤다. 레이가 벌써 자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세라비는 절망해서 자기 방으로 도로 뛰어내려와 지금 입고 있는 잠옷이나 다름없는 옷 위에 외출용 코트를 걸쳐 입었다.


게로스의 시종이 세라비의 응접실 문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세라비는 문을 벌컥 열고 “폐하 언제쯤 오시는데요?”하고 소리쳤다.


시종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밑에 이미 와 계십니다.”


세라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시종의 등 너머로 이미 게로스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과자가루는 다 치웠을까? 테이블은?


게로스는 세르비카 대사가 세상에서 제일 편해 보이는 옷(왕궁 창고에 생각보다 여러 가지 옷이 있었네,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위에 밖에서 입는 외출용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것을 보고 너무 급히 찾아온 것을 후회했다.


응접실 구석에서 하녀가 뭔가 급히 치우고 있는 것이 세르비카 대사의 풀어헤친 머리 뒤로 보였다. 소파에는 하녀가 미처 치우지 못한 책이 한 권 뒤집어진 채로 놓여 있었다. 별궁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이었다. 게로스는 소파에 앉으면서 그 책의 제목이 『급류 타기: 이것만 알면 뗏목 타고도 간다』인 것을 보고 당황했다.

‘여기 오는 길에 쿠젤 강에서 고생했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에 그러나?’


“갑자기 와서 죄송합니다.” 게로스는 책을 못 본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 “쉬시는 중인데 방해가 되었겠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책을 게로스 눈에서 안 보이는 데로 치우며 세라비가 말했다. 과자 부스러기를 다 치운 하녀가 차와 멀쩡한 다른 과자가 담긴 접시를 가져다 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오늘 오스틴 대사를 만났습니다. 결과를 얘기해 드리려고 늦은 시간이지만 잠깐 뵈러 왔습니다.”


세라비는 “브리엘 부대사님을 곧 불러오겠습니다!”하고 벌떡 일어났다. 게로스는 ‘이 분은 항상 진정시켜 드려야 하네…’ 고 생각하며 세라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내일 세드릭 경이 문서로 만들어서 가지고 올 거니까 부대사님 쉬시는데 굳이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게로스는 그렇다면 자기도 굳이 지금 올 필요 없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자신의 방문을 어떻게 세르비카 대사에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힘드셨겠네요. 피곤하실 텐데 직접 이렇게 알려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세라비는 어제 아침만 해도 눈빛으로 찔러 죽일 듯이 찾아와서 담은 뭐 하러 넘었냐고 취조하던 왕이 오늘따라 왠지 겉보기와는 달리 너덜너덜하게 지친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굳이 오늘 방문한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속이 복잡했던 게로스는 이 말에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세라비는 게로스가 왠지 지쳐 보여서 어떡하지? 하다가 ‘아하! 피곤할 땐 역시 단 걸 먹으면 좋지 않을까?’하고 큰 접시에 담아 갖다 놓은 과자 하나를 작은 접시에 담아 게로스에게 내밀었다. 게로스는 이카리아 대사가 갑자기 과자를 내미는 바람에 약간 당황했다.


“제 방 담당 하녀가 사 갖고 온 건데, 시내에서 유명한 과자점이라고 합니다.” 세라비는 이게 하녀가 줄을 얼마나 서서 사 갖고 온 것인지 설명했다. 게로스는 접시를 받아 들었다. 기다란 슈 위에 초콜릿을 바르고 베리류의 작은 과일을 얹은 에클레르였다.


아차, 젊은 여자분이라면 당연히 디저트를 좋아할 테고 그렇다면 어제 산책한 다음에 티타임도 했어야 했는데 왜 어제 그걸 생각 못했을까? 하고 게로스는 후회했다. ‘나야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그런 자리조차 가지지 않아서 미처 생각 못했다 치고 코린은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람.’


“디저트 좋아하시는 줄 알았으면 어제 산책하고 나서 차라도 다 같이 마실 걸 그랬나 보네요.”


세르비카 대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제는 차 안 마셨어도 정말 좋았습니다. 걷는 것도 좋아하구요.”


세라비는 게로스가 에클레르를 쳐다만 보고 먹지 않자 불안한 표정으로 게로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안 먹지? 단거 싫어하나? 역시 살찔까 봐 안 먹는 거구나! 왕도 몸매관리를 해야 하나 보네. 하지만 우리 마르셀 폐하는 배가 좀 나오셨는데… 그건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가? 앗, 그렇다면 이분도 나이 들면 배가 나오게 되는 건가?’


‘근데 난 왜 이런 생각만 하고 있지? 이분은 지금 중요한 외교 회담 결과를 말해주러 오셨는데 난 왜 맨날 이 모양이지?’


게로스는 세라비가 자기가 권하는 과자를 안 먹는다고 기분이 나빠서 저렇게 빤히 쳐다보나 하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한입 먹어 보았다. 얇은 초콜릿 껍질이 바삭하게 부서지며 속에 든 커스터드와 새콤한 베리잼이 입 속에 퍼졌다.


‘생각보다 맛있네.’ 게로스는 평소에 간식을 거의 안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줄을 서서 사 갖고 올 정도로 유명한 거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무튼 꽤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먹는 것을 보고 세르비카 대사가 왠지 안심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회담 결과 말씀인데요…” 게로스는 에클레르의 나머지 반을 접시에 내려놓고 말했다. “사실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게로스는 결과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간략하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오스틴과의 대화는 길었지만 결론은 간략한 한 마디 ‘안된다’ 뿐이었으므로) 일이 잘 되지 않은 것을 사과했다. 세라비는 약간 힘이 빠졌지만 실망하는 티는 내지 않았다. 어차피 회담 한 번으로 잘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끝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 볼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침울해할까 봐 얼른 이렇게 말했다. “쉽진 않을 거라고 저희도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희가 가져온 뤼넬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세라비는 자신들이 도착한 첫날부터 뤼넬 얘기를 했는데도 게로스나 코린 쪽 반응이 시원찮은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르셀 왕과 삼촌이 칼베르에 가서 하라고 한 것은 뤼넬 전달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얘기해 보았다.


게로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2천 년도 더 된 고대 유물 따위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줄 거라고 믿지도 않았을뿐더러, 사람의 노력으로 위기를 해결해야지 초현실적인 힘에 의존하려는 것은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생각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사실상 이카리아 사신들이 뤼넬을 가져왔다고 어서 뭔가 해봅시다! 라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르비카 대사는 마르셀 왕이 시킨 것을 해야만 할 테니 다시 뤼넬 얘기를 꺼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였다.


오스틴과 스칼하븐 사이에서 칼베르가 줄타기하며 시간을 벌고 있긴 했지만, 게로스는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충분치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미묘한 균형이 깨지는 순간, 칼베르는 둘 중 한 나라의 침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을 대비해서 신의 힘이든 유물이든 준비해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게로스는 세르비카 대사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정말로 신의 힘이라도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며칠만 있으면 플로르 왕자님이 도착하실 테니 저희 솔렌이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샤토 데쥬의 창조신 신전에 있다고 하니까, 같이 가시죠.”


세라비는 표정이 밝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로스는 이제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다가 세르비카 대사가 왠지 뭔가를 더 기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게로스는 ‘눈 참 땡그랗네’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그거… 별로인가요?” 세라비는 게로스가 접시에 남긴 에클레르 반쪽을 가리켰다.


게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는 “아니요, 아주 맛있습니다.”하고 나머지 에클레르를 먹은 다음, 편안히 쉬시라고 인사하며 일어났다. 세라비는 ‘아!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난 또 과자 얘기만…!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삼촌 대체 왜 저를 보내신 건가요…!’하고 속으로 부르짖으며 게로스를 배웅했다.

에클레르-NEW 복사.png 벽난로가 타오르는 고전적 거실에서, 소파에 앉은 여성이 맞은편 남자에게 에클레르가 담긴 작은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민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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