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마차가 파렌베르크 시내로 들어서자, 높은 언덕 위에서 희고 푸르게 빛나는 슐로스 루와얄이 시야에 들어왔다. 플로르 왕자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자신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플로르는 파렌베르크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플로르는 칼베르의 이웃인 이카리아의 왕자였고 두 나라 왕실이나 정부 차원에서 사람이 오가는 일은 매우 자주 있었다. 반년 전 바다 건너에서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함대가 나타나 포르트메르와 마르벤을 각각 차지하고 앉기 전까지는 플로르는 칼베르에 누군가가 간다고 하면 기를 쓰고 따라가서 게로스를 만나고 오곤 했다.
그러나 플로르는 여러 번의 방문 중에서도 가장 첫 방문, 플로르가 여덟 살의 아직 어린 왕자였을 때, 칼베르 왕의 대관식에 초청받아서 갔던, 플로르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그날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플로르는 아직 어렸지만 이카리아의 왕자였으므로 부모님과 함께 귀빈석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궁전의 정 중앙을 가로지르자, 귀빈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베르의 새로운 왕이 대신전에 입장했다. 그의 뒤를 의전 귀족들, 고위 성직자들과 왕궁 근위대가 칼베르의 국기와 왕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과 보주와 왕홀, 세 수호신의 상징 - 남풍의 신을 상징하는 깃발, 강의 여신을 상징하는 물결 문양의 검, 농사의 여신을 상징하는 황금의 낫 - 을 들고 따랐다. 왕이 걸친, 안쪽이 순금색 비단으로 된 깊고 묵직한 진홍색 벨벳의 긴 망토는 게로스의 어깨에 태양처럼 생긴 둥근 브로치로 고정되어 있었다.
게로스가 대관단의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플로르는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진홍색 망토 자락이 계단을 타고 흐르고, 그 위에 선 그는 마치…
플로르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직 왕관이 그의 머리에 얹히지도 않았지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존재이고 완벽한 왕이었다.
깊은 청색의 벨벳 쿠션 위에 얹힌 왕관을 들고 대사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왕좌에 앉은 게로스의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지자, 대신전의 모든 소리, 사람들의 탄성, 환호, 악기 소리와 합창 소리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플로르는 사랑에 빠졌다.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신화와 찬가는 지금 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모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을 사람, 세상의 질서가 이 사람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도 불공평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사람은 플로르 혼자만이 아니었다. 플로르는 스칼하븐의 군대가 포르트메르를 점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칼베르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나 세르비카 경을 비롯한 궁중의 어른들은 열다섯 살의 왕자가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세하게 얘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플로르는 알고 있었다. 7년 전 그날, 슐로스 루와얄 정원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무서운 공주들, 그 사람들 때문에 지금 플로르는 게로스를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것을. 플로르는 여자들도 그렇게 무섭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기도 했지만, 이제 막 대관식을 올린 스무 살의 칼베르 왕이 물건도 아닌데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싸우는 공주들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렵게 느껴졌다.
나중에 플로르가 왕위에 오를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러는 것인지 왠지 눈물이 글썽해서 대관식을 바라보던 어머니 플로렌틴 왕비는, 외국의 공주들이 누구의 머리채인지도 모르고 잡히는 대로 싸우는 것을 어이없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플로르도 이렇게 잘 생겼으니 나중에 서로 갖겠다고 저렇게 싸우면 어쩌니…”
어머니, 그럴 일은 없어요, 하고 플로르 왕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는 이미 영원히 좋아할 사람이 생겼거든요.’
마차가 돌다리를 넘어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플로르는 모두를 파렌베르크로 보내 놓고 혼자 브레스부르의 수도원에 남아 어서 몸이 회복되어 자신도 파렌베르크로 갈 날을 상상하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페르카 원장을 따라 수도원 안과 주변을 산책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세라비와 레이와 레이첵이 탄 마차를 따라 파렌베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시종이 플로르가 내리도록 손을 내밀었다. 플로르는 마차에서 내리고는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을 잠시 뜨지 못했다.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자 강한 빛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게로스가 대관식 날 귀빈석 앞열에 앉아 있던 어린 플로르를 보고 상냥하게 지어 주었던 그때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서 있었다.
플로르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 순간만을 위해 그는 이카리아의 유일한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왕궁을 나와 스칼하븐의 군사들에게 쫓기고, 길도 없는 험한 산을 오르고 동굴에서 잠을 자며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었다.
게로스는 플로르가 탄 마차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카리아 사신들이 도착해서 알려준 충격적인 사실 - 자기네 나라 왕자도 같이 산을 넘어와서 지금 브레스부르의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왜 이카리아의 왕자가 외국의 침공을 받아 망명해야 할 상황도 아닌데 제대로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닌 브뤼메 산맥을 넘어 여기까지 와야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카리아 사신들에게 물어봐도 왕자님이 원해서 오셨다고만 했다. 강제로 가라고 해서 온 게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 왕자가 여길 오고 싶어 했을까?
플로르 왕자는 원래도 칼베르에 오는 걸 좋아했다. 아니라면 그렇게 굳이 파렌베르크에 오는 사절단마다 다 따라오진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오는 사신단이든 문화예술로 오는 사절단이든 이카리아에서 오는 웬만한 사신 일행에는 거의 매번 플로르 왕자가 동반했다. 그래서 게로스나 칼베르의 대신들은 이카리아 왕자가 우리나라를 저렇게 좋아하니 앞으로 이카리아와의 우호는 걱정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2천 년이 넘도록 두 나라의 사이가 나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것은 세상이 평화로울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아무리 칼베르를 좋아하더라도 왕자가 여기까지 와야만 할 일은 없었다. 심지어 위험했다. 이카리아 왕자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스틴이나 스칼하븐에서는 아무리 왕자가 열다섯 살 밖에 안 된 소년이라 할지라도 두 나라가 연대하려고 한다며 트집을 잡을 것이었다.
사신들의 존재도 문제가 되긴 마찬가지였지만, 왕자가 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카리아 왕자를 언제까지 그가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잠시라면 괜찮지만 만약에 길어진다면? 곧 겨울이 될 테니 남쪽 해안에 있는 왕실 별장에 보낼까? 자기네 나라보다는 춥겠지만 그래도 겨울을 지내기엔 괜찮을 것이다.
일단 온 목적부터 물어보자,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사신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르셀 왕이 뭔가 왕자를 통해 전하려던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 왕은 그다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플로르가 마차에서 내려서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게로스는 이 모든 추측과 의문이 다 틀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동안 플로르 왕자가 그렇게 수없이 파렌베르크에 찾아왔던 이유와, 여기 올 때마다 수줍게 자신을 보던 눈빛, 돌아갈 날이 되었는데도 왠지 가기 싫은 듯이 마차에 오르던 그 몸짓, 모든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이 아이… 나 때문에 왔구나.’
게로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물론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플로르뿐만이 아니었다. 게로스는 남자던 여자던,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가 자신을 숭배하고 열망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백만 명이 안타깝고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아도 길가에 널린 조약돌들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기 앞에서 눈에 눈물이 고이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고 서 있는 아이는, 자기처럼 한 나라의 왕자였다. 왜 이 따위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이 애가 수도 없이 파렌베르크를 찾아오며 자신에게 던졌을 그 수많은 눈길들을 그동안 왜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직 어려서? 그 나이쯤 되는 아이들은 대부분 수줍어하니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 게로스는 플로르가 안타깝고 가엾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로스는 외국 귀빈이 오면 으레 하듯이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생각을 바꿔 플로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으신가요?”
플로르 왕자는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젠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게로스가 방금 악수 대신 어깨를 두드려준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을 참이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