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실 문고리 붙들고 기도했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어느 겨울, 나는 매우 냄새나고 더러운 채로 뮌헨 공항을 떠돌고 있었다. 이틀째 못 씻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떠돌이 생활 중이었다. 나는 외국에서 어학연수 중인 가난한 한국 학생이었다. 세 들어 살고 있던 아파트(플랫)의 내 방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일주일 남겨놓고 비워 주어야 했다. 그건 원래 계약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주인이 크리스마스 휴가 일주일 전에 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기의 마지막 일주일을 지낼 곳을 찾아야만 했다. 지낼 곳은 금방 구해졌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스웨덴 여자애 하나가 로컬 남자친구가 생겨서 남친 집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나는 건너 건너 친구인 애를 통해 그 여자애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좋은 리큐르 한 병 사 준 다음 그 방에 들어갔다.
학기가 끝나자 기숙사도 비워 줘야 했다. 다음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갈 곳이 없던 나는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네 집으로 갔다가 또 다른 친구네 집으로 떠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피렌체였다.
아아 피렌체, 너무나 가보고 싶었다. '전망 좋은 방' 생각을 하면서 고요히 흐르는 아르노 강과 두오모를 배경으로 나도 멋진 남자도 만나보고 우아하게 산책도 해 보는 장면을 꿈꾸며 여행사에 가서 가장 싼 항공권을 끊었다.
왜 내가 에딘버러 출발하는 표를 안 끊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런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무튼 출발 공항은 런던이었다. 맨체스터에 들러 지인에게 짐을 맡기고, 기차로 히드로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이었다. 나처럼 아침 첫차(?)를 타기 위해 여기저기 의자에 노숙 중인 사람들로 공항은 마치 난민촌 같았다. 나도 어찌어찌 의자 하나를 찾아 가방을 베고 누웠다.
그래서 아침에 비행기를 탔을 때에는 이미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어제 에딘버러를 출발해서 히드로 공항에서 노숙할 때까지 샤워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았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사람들에게 불쾌함을 주지 않도록 머리에 모자를 썼다. 이미 머리가 근질근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빨리 피렌체에 도착해서 좀 씻고 싶었다.
루프트한자 비행기였기 때문에 뮌헨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비행기가 연착을 했다. 환승구역으로 가는 줄도 겁나 길었다. 누구든 붙잡고 얘기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빨리 갔어야 했는데, 나는 조용하고 소심한 동양인이라 말도 못 하고 그냥 그 줄을 다 서서 기다렸네 아놔. 결국 뮌헨-피렌체 비행기는 나를 두고 가 버렸다.
직원은 나에게 다음 비행기에 옮겨 주겠다고 하며 자기네 비행기 지연으로 못 탄 거니까 밀쿠폰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친구한테 도착 편 바뀌었다고 연락하도록 전화도 걸어 주었다. 매우 화가 났지만 밀쿠폰을 주자 갑자기 화가 조금 풀렸다(한국 사람은 밥에 약하다).
밥도 밥이지만 좀 씻고 싶었다. 나는 이미 약 30시간 동안 씻지도 못하고 머리도 기름으로 떡져 있었다. 향수를 뿌려도 퀴퀴할 것이었다. 공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샤워실이 있었다. 그때 샤워실 앞에 샤워 모양의 그림 말고 다른 것도 보았어야 했는데... 너무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그런지 아니면 보고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 아무튼 나는 바로 샤워실로 뛰어들었다.
샤워실은 우리 대중탕 같은 곳이 아니라 완전히 분리된 개인용 칸으로 되어 있어서 문 닫고 들어가면 나 혼자 가방도 놓고 옷도 갈아입고 씻고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쏟아지는 물에 너무 감사하며 벅벅 씻고 머리 감고 수건으로 닦았다. 이제 문을 열고 나가서 거울 옆에 있었던 것 같은 드라이로 머리도 좀 말리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남자 목소리가 들리지?
설마 여기 남녀 혼용인가?
설마 아무리 독일이라도 그럴 리가. 여자 샤워실에 왜 남자가 있지?
아니 근데, 내가 여기 남자용인지 여자용인지 보고 들어왔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왜 남자용인지 여자용인지 보지도 않고 들어왔더라 내가? 너무 씻고 싶어서 눈이 멀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깊은 무의식 어딘가에 살아생전 한 번쯤 남탕에도 가보고 싶다는 더러운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가 내 눈을 가린 것일까?
뭐가 어찌 됐던, 저 사람들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야 나도 나갈 수 있는데, 두 남자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씻으러 왔으면 빨리 씻을 것이지 왜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 문을 아주아주 살짝 열어서 틈으로 내다보니 빤쓰만 입은 남자 둘이 서서 뭔가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제발 들어가 주세요 형님들! 사연이 뭔지는 모르지만 씻은 다음에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가서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는 것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남자 샤워실(임에 틀림없는)에서 들키지 않고 나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대화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저놈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야말로 대 재앙이다. 무슨무슨 죄로 독일에서 유치장에 갇히는 배드 엔딩을 상상하며 나는 틈틈이 문을 살짝 열어 내다보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두 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다 한 다음 조상님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개새끼들아 제발 좀 씻으러 들어가 주라! 나는 울면서 샤워실 문고리에 달라붙어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두 남자는 이제 옆집 조상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나 밥도 먹어야 하고, 다음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저 두 놈이 나를 보고도 한 번만 모른 척해주면 될 텐데, 괜찮을까? 달려 나가는 내 머리채를 붙잡고 Erregung öffentlichen Ärgernisses(한국의 풍기문란죄?) 같은 죄로 나를 고발하면 나는 한국 집에 연락도 못 하고 독일 감옥에서 평생을 썩겠지!
나는 그저 피렌체 가는 길에 좀 씻고 싶었을 뿐인, 전날부터 못 씻은 불쌍한 동양 여자일 뿐인데...
하느님 부처님 신령님, 그리고 두 독일남 님,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는 문을 열고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쳐다보는 빤쓰만 입은 두 독일 남자를 뒤로 하고 샤워실을 뛰쳐나갔다. 고함을 지르거나 뒤쫓아 오는 사람은 없었다. 100미터 20초에 뛰는 나이건만 짐가방까지 끌고 올림픽 단거리 선수만큼 빨리 뛰었다.
샤워실 입구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착하자,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젖은 머리를 촤락 흔들어 말리고 우아하게 밥을 먹으러 갔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당시 독일은 유로가 아니라 마르크화를 썼다. 내 밀쿠폰은 대충 20마르크(약 15,000원)쯤 되었다. 대충 라비올리인가 라자냐 같은 것을 먹었던 것 같다. 피렌체 가면 더 맛있는 걸 먹을 거기도 했지만 정신이 안 돌아와서 뭘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렌체 공항에 내리자 친구와 친구 여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어땠어? 지연돼서 힘들었겠다."
나는 남자 샤워실 얘기는 차마 못 하고 친구에게 대답해 주었다.
"어, 공항이 좋아서 괜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