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오스틴의 사령관이자 레지널드 국왕의 셋째 딸인 테사 공주는 슐로스 루와얄 중앙의 홀을 걷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샹들리에의 수많은 조각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손에 든 횃불을 반사하여 황금 조각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컸다. 남자만큼이나 키가 컸다. 쏘아보는 듯한 회색 눈과 투구 밑으로 땋아 내린 긴 머리는 전설에 나오는 여전사와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 수많은 전투에서 직접 싸운 무서운 전사였다.
게로스의 대관식에서 스칼하븐의 라그나 공주와 테사의 큰언니인 사만다가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 끼어들어 라그나 공주를 반 주검을 만들어 놓은 것은 테사였다. 그러나 둘째 언니인 레이첼의 팔을 부러뜨린 것도 테사였다. 오스틴의 다섯 공주들은 서로 사이가 나빴다. 아버지 레지널드 14세 국왕은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사만다에게 줄 것처럼 하다가도, 너희들 중에 가장 적합한 아이가 있으면 그 애에게 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스틴의 공주들은 서로를 모두 경쟁자로 여겼고 따라서 서로 지독하게 싫어했다.
에르다 여왕처럼 레지널드 왕도 칼베르를 탐냈다. 그는 가장 큰 나라의 왕이었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잠재적인 오스틴의 식민지로 보고 있었다. 자기 딸들이 남의 나라 왕 대관식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스칼하븐 공주를 들것에 실려갈 정도로 두들겨 패 놨어도 여자애들이 싸우다 보면 좀 다칠 수도 있지, 라며 에르다 여왕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에르다 여왕은 가뜩이나 오스틴을 천년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는데 딸이 실려 돌아오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사이의 전쟁은 두 국가 사이의 오랜 적개심과 칼베르를 먼저 차지하고 싶은 욕심, 거기에 칼베르 왕을 가지고 싶은 공주들의 경쟁심이 모두 혼합되고 뭉쳐 폭발한 결과였다.
“이 따위 조그만 나라 하나 쳐부수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테사 공주는 발에 걸리는 샹들리에 조각을 발로 차내며 말했다. 테사의 부관인 에런 베인즈 소장은 칼베르가 오스틴과 스칼하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나라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스틴에서 군 사령부 소속으로 일하며 가장 힘든 일은 바로 테사 공주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파렌베르크까지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사는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포르 칼레즈만 함락시키면 금방 파렌베르크로 진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토네르에서 칼베르 군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던 것이다. 에런은 테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스칼하븐과 교전 중이던 함대들을 일부만 남기고 모두 칼베르로 향하게 한 것이 레지널드 왕의 결정인지 아니면 테사 혼자 결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테사 한 사람의 독단이라 해도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왜 갑자기 칼베르를 치는지, 중립국인 칼베르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면서 이 많은 함대를 다 내보내는 이유는 뭔지, 아직 스칼하븐과 대치중인 지역은 내버려 둬도 된다는 건지 어쩌라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에런은 테사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마이라 킨슬리 참모장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이라는 테사의 오른팔이니 아마도 왜 자기들이 갑자기 칼베르에 와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테사가 말하면 죽인다고 하기라도 한 듯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에이번홀트의 총사령부도 그냥 테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만 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군사력이 미미하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칼베르 군은 포르 칼레즈에서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사 공주는 첫 번째 함대가 포르 칼레즈 앞바다의 좁은 해협에서 칼베르 해군에게 차례로 격파당하자 “이 새끼들 역시 숨어서 다 준비하고 있었어!”라며 거칠게 욕을 해댔다.
칼베르 군은 오스틴의 것보다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대포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상보다 숫자도 많았다. 그들은 포르 칼레즈 만 입구에 높은 언덕처럼 위장한 포대를 설치해 놓고 진입하는 오스틴의 함대를 거칠게 공격했다.
테사 공주는 이 많은 함대가 포르 칼레즈 앞바다에서 쩔쩔매고 있자 불같이 화를 냈다. 포르 칼레즈 다음으로 큰 항구인 포르앙블루로 갔던 다른 함대들이 루스카 용병 부대와 칼베르 해군의 공격을 받고 상륙조차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날은 테사 옆에 마이라 말고는 접근할 엄두도 못 냈다.
“루스카까지 불러들였다고? 이 새끼들 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거야?”
에런은 자신들이 칼베르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자신들이 규모나 무기 모두 압도적이므로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테사는 그 시간을 참지 않았다. 에런은 테사가 소형 함정들로 자폭 공격을 결정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임무에 배정된 병사들의 마지막 경례를 받으면서 그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다.
포르 칼레즈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생토네르에서는 칼베르 군이 오스틴이 파렌베르크로 못 들어가도록 다리를 끊고 도로도 파괴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고향을 떠난 지 몇 달인지 세다가 그만둔 오스틴 병사들과, 자기네 나라와 상관도 없는 칼베르에서 자신들이 뭘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싸우다 죽은 리스코바 병사들을. 그들은 생토네르의 절벽들 사이에서 죽었고 아무도 묻어주지 않았으므로 아직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테사가 빨리 파렌베르크로 들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파렌베르크 외곽에는 루스카 부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라 킨슬리는 이때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렌베르크로 진입했다.
파렌베르크에서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맞닥뜨렸다. 파렌베르크의 남녀 시민들로 구성된, 제대로 된 무기도 들지 않았고 전투 훈련 같은 것은 더더욱 받지 못한 민병대가 왕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공격하고 차례로 쓰러져 갔던 것이다. 에런 베인즈뿐 아니라 마이라도, 심지어 테사조차도 당황했다. 에런은 이 나라에서는 게로스 왕을 신처럼 섬긴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쪽에서 레지널드 국왕을 부르며 싸울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군.’ 에런 베인즈는 생각했다.
그런 이 나라 왕에게 구혼 중인 것은 바로 오스틴의 공주들이 아닌가? 에런은 구혼 상대의 나라에 갑자기 공격을 감행한 테사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었다. 그들은 테사의 명령에 따라 파렌베르크 시내의 주요 건물들을 무너뜨리고 불태우며 왕궁으로 진격했다.
성을 지키는 칼베르 군은 포르 칼레즈나 생토네르보다 더 끈질기고 집요하고 거칠게 싸웠다. 오스틴 군은 왕궁의 성벽에 대포를 쏘아 무너뜨렸다. 미리 잠입시킨 오스틴 정예병들이 성 안에서 칼베르 부대를 기습 공격하며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칼베르 군이 이미 성문으로 이어지는 돌다리를 끊어 놓았으므로 그들은 파렌베르크 시내의 쉬드르 신전에서 몇백 년 묵은 큰 나무들을 베어갖고 와서 다리를 놓으며 성으로 진입했다.
“우리가 아무리 스칼하븐하고 오랫동안 싸웠어도 신전은 안 건드렸습니다. 대체 제독님은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에런의 말에 마이라는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리 놓을 나무가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성에 진입 못했다고 하면 전하가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공격받아본 적 없는 슐로스 루와얄의 푸른 탑에는 오스틴의 국기가 걸렸다. 테사는 왕궁으로 들어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침내 파렌베르크를 함락시켰다. 이제 칼베르는 테사와 오스틴의 것이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