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스칼하븐만 도왔을 것 같나?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게로스는 파렌베르크 외곽의 일을 보고 받고 즉시 왕궁을 떠날 준비를 했다. 코린은 장 바티스트와 함께 미니스트렐의 총사령부에 남아 있었지만, 곧 그곳을 떠나 파렌베르크 서쪽에 있는 수도 방위군 기지에서 게로스와 합류하기로 했다.
성벽 너머 파렌베르크 시내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았다.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고 돌바닥이 미세하게 울렸다,
왕궁 수비 전담 부대를 지휘하는 알베르 중령은 게로스에게 빨리 퇴각할 것을 권유했다.
“미니스트렐도 곧 폐쇄합니다. 폐하, 적의 진격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게로스는 알베르 중령과 근위대원들에 둘러싸여 왕궁 서관의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다리는 적이 건너지 못하게 이미 무너뜨려 놓았으므로 남은 길은 서쪽 후문뿐이었다. 왕을 호위할 근위대는 이미 후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폭발음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훨씬 가까웠다.
‘스칼하븐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스틴이 너무 빠르군. 며칠만 늦게 왔어도 성을 내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게로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연이어 터지는 폭발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설령 왕궁을 빼앗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었다. 밀리면 반격하면 되고 빼앗기면 되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폐하! 이쪽은 안 되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놈들이 통로를 막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직 성문을 막고 있지 않나?”
“잠입한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복도 끝에서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번쩍였다. 근위대원들이 창과 검을 휘둘렀다. 알베르와 게로스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반대쪽 복도 끝에도 낯선 철제 갑옷이 번뜩였다. 그림자 속에서 오스틴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이쪽은 제가 상대할 테니 피하십시오!”
알베르가 검을 뽑았다. 오스틴 병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스틴 병사가 갑자기 허공에서 몸이 꺾이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등에 무언가 꽂혀 있었다. 검은 아니었다. 그것은 낫이었다. 게로스는 그것이 왕궁의 신전에서 퀼테베르 여신의 전례에 사용하는 낫임을 알아보았다.
오스틴 병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뒤에는 갈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오스틴 병사는 쓰러지기 전에 갈색 로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갈색 로브는 짚단처럼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게로스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파렌베르크 대신전의 여사제 도미니크 아르노였다.
“폐하, 솔렌과 뤼넬은, 반드시 두 왕가의 혈통이 함께 있어야만 깨어납니다.”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에서 울컥 피를 토했다. 알베르가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도미니크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게로스는 그녀가 남긴 말을 되씹어 볼 시간도 없었다. 오스틴 군이 이미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테사 공주는 승리의 웃음을 지으며 부하들이 끌고 온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칼베르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테사의 부하들이 창을 겨누고 있는 신세였다. 이 사람 하나를 위해 스칼하븐의 라그나와 테사의 자매들은 전쟁도 불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테사도 다르지 않았다. 대관식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그를 보았을 때, 이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테사도 생각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사람을 갖고 싶다고.
그러나 그 찬란하게 빛나던 왕은 이제 테사의 포로였다. 테사는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테사는 에이번홀트에서 칼베르의 첩자를 발견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에이번홀트 외곽의 군수공장 창고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거기서 일 년이 넘게 일하고 있어 아무도 그가 칼베르 첩자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발각된 것은 창고 관리인인 그가 건물 배관공으로 위장해서 총사령부 건물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은신처에서 찾은 문서들은 오스틴 총사령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테사를 비롯한 총사령부는 칼베르 첩자가 그동안 오스틴의 군사 정보를 빼돌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 정보들이 적국인 스칼하븐으로 일부 흘러들어 간 정황을 발견하고 곧바로 칼베르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렇게 대대적인 규모의 총공격을 결정한 것은 테사였다. 칼베르는 군사력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는 나라였으므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스칼하븐과도 대치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테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칼베르의 첩자는 오스틴에 온 지 이제 일 년 밖에 안 된 자였다. 즉 그보다 앞서 그의 전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과 고국이 벌이고 있는 일을 실토한 후 잠시 테사가 눈을 돌린 틈을 타 소지하고 있던 독을 먹고 죽었다.
칼베르의 왕은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싸우는 동안 중립을 지키며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결한 척하며 그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굴리고 있었다. 그녀는 저 위선적인 자 하나를 바라보며 그동안 달려왔던 자신에 대한 굴욕과 부끄러움과 분노로 폭발하고 타올랐다. 아버지나 큰언니 사만다가 뭐라고 하던 상관없었다. 그녀는 당장 칼베르를 모조리 불태우고 게로스를 잡아 죽여야만 했다.
테사는 게로스의 앞에 섰다. 그녀는 키가 컸으므로 게로스와 눈높이도 거의 같았다. 게로스는 테사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대관식 날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공주였으므로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테사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로스의 차분한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웃다니 배짱이 좋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계집애같이 생긴 게 우리를 갖고 놀아? 네가 보낸 첩자가 네놈들이 그동안 스칼하븐을 몰래 도왔다고 다 자백했다!”
게로스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우리가 스칼하븐만 도왔을 것 같나? 나한테 감사해야 할 텐데.”
“뭐라고?”
순간, 테사의 머릿속에는 오스틴의 해안 도시 그레이브웰을 스칼하븐이 기습 예정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가 사령부에 흘러 들어왔던 기억이 스쳤다. 덕분에 그레이브웰은 간신히 사수할 수 있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몇 번 일어나자 사령부는 혼란에 빠졌다.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테사는 그동안 저 자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분노로 손을 치켜들고 게로스에게 덤벼들 듯 성큼 다가섰다. 게로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테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차마 저 얼굴을 때릴 수가 없었다. 쳐들었던 손이 떨렸다.
“가둬놔.”
테사는 내뱉듯이 이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