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가 아직 왕궁에 계십니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미니스트렐의 행정부 청사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파렌베르크 시내는 여기저기서 치솟는 불길로 밤인데도 축제날처럼 환했지만 미니스트렐의 청사들 사이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미니스트렐은 왕이 부르면 빠르게 달려갈 수 있도록 왕궁과 마주 보고 있었다. 미니스트렐의 반대쪽에는 쿠젤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쿠젤 강도 오늘 밤 여기저기서 터지는 불빛을 반사해서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레이와 세라비는 각 청사 건물의 입구마다 오스틴 군복을 입은 자들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청사의 어두운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레이의 마법으로 게로스가 왕궁 안에 있는 것은 확인했으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성문은 오스틴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성벽의 모든 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 숨어들 그늘조차 없었다.
세라비는 레이의 손등 위에 올라가 있는 소용돌이치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바람은 은빛이나 눈부신 푸른빛 대신 희미한 빛만 겨우 발하고 있었다. 지팡이의 바람을 자신의 수하 부리듯이 다루고 있는 레이의 여유 있는 모습은 세라비가 레이의 이야기로만 들어 상상하고 있던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코린 경이 아직 여기 있어요.” 레이가 속삭였다. 사령부를 비롯한 행정관구 사람들은 오스틴이 파렌베르크 시내 중심가에 가까워지자 모두 대피했다. 그러나 레이는 코린이 게로스를 두고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보고 있었다.
“어디에 있어?”
“맞은편 건물 지하인 것 같아요. 거기가 정보국 건물인가 보네요.”
그러나 정보국 건물 정문과 후문과 측문까지 모두 오스틴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세라비는 다른 건물로 올라가 지붕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도 없는 건물들을 뭐 하러 지킨담.” 레이는 투덜거리듯이 말하고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차고 습한 공기가 확 밀려들어 왔다. 세라비의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축축한 공기가 그들을 에워쌌다.
미니스트렐은 순식간에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성벽을 밝힌 횃불들 때문에 왕궁이 잘 보였었는데, 이제는 일렁이는 안개를 뚫고 희미한 노란 점이 몇 개 보일 뿐이었다.
“안개 일으킨 거야?” 세라비가 물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비는 욘도로케와 결투할 때 레이가 분위기 잡는다고 먹구름을 불러왔던 것을 떠올렸다. 이젠 안개도 불러올 수 있구나, 하고 세라비는 속으로 경이로워했다.
레이는 정문과 후문과 측문 중 어느 문을 공략해야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숫자가 생각보다 많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신호탄 패턴은 다 바뀌었을 텐데, 아직도 색깔은 그대로 쓰려나?” 레이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청사 건물들 사이의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길고 복잡한 주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밝은 오렌지색 불빛의 포슬포슬한 공이 떠오르며 미니스트렐과 왕궁 사이의 허공에서 터졌다. 이윽고 같은 색깔의 불빛이 연이어 떠올랐다. 세라비는 밝은 불의 공이 매우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잃고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불빛들은 불규칙한 리듬을 가지고 터졌다.
안갯속에서 미니스트렐을 지키고 있던 오스틴 병사들은 갑자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지원요청인가?” 그들 중의 한 명이 외쳤다.
“너무 많이 터지는데, 비상인가?”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외치더니 안갯속으로 우르르 사라졌다. 정보국 건물에는 정문을 지키는 병사 두 명만 남아 있었다.
세라비와 레이는 건물 그늘에 숨어 정보국 청사 측문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텅 비어 있었다.
“이쪽이에요.” 레이가 속삭였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는 옮기다가 떨어졌는지 문서 몇 장이 지하실 문의 틈새바람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레이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조용한 청사 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세라비와 레이의 뒤로 지하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습한 공기와 함께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두운 지하실 내부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코린 경, 저희예요.”
레이가 어딘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곧바로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왔다. 코린이었다.
“브리엘 부대사님?” 코린은 레이를 얼싸안았다. “대사님이 여길 대체 어떻게…”
코린은 뒤이어 레이의 뒤에 서있는 세라비를 발견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세르비카 대사님까지…! 두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
코린은 레이의 지팡이를 보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대사님은 사람을 찾으실 수 있으니…”
코린은 흐느낌을 목으로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폐하가 아직 왕궁에 계십니다…!”
세라비는 떨리는 입술로 겨우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코린의 얼굴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스카 놈들…! 포르앙블루에서는 잘 싸워 주더니, 수도 방어선에서는 오스틴과 내통해서 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외국 용병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레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오스틴 편에 자기네 부족이 있었던 건지, 오스틴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한 건지, 아무튼 수도 방어선이 그놈들 때문에 순식간에 뚫렸습니다. 폐하는 피할 새도 없이 당하신 것 같습니다. 폐하를 구해야 합니다…!”
레이가 물었다. “경은 여기 지하실에서 뭘 하고 계셨나요?”
“여기에 왕궁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들어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가 주십시오!
“경께서는 전투경험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레이가 물었다.
“정보요원은 격투 훈련을 받습니다.” 코린이 대답했다. “자기 신변보호는 기본입니다. 암살용 독극물 제조, 통신과 화약 다루는 법도요.”
“그럼 칼베르 군에 신호를 보내실 수 있겠군요. 지금 가장 가까운 우리 부대는 어디 있습니까?”
“파렌베르크 서쪽 외곽에 기지가 있습니다. 폐하는 원래 그쪽으로 피신하실 예정이셨습니다. 저하고도 거기서 만나기로 했었구요.” 코린은 분하고 원통한지 계속 울컥하며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스칼하븐도 도착할 텐데, 그 새 이렇게 되다니…!”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흠칫하며 세라비의 표정을 살폈다. 세라비는 못 들은 척했다.
“왕궁으로 들어가면 어디하고 연결되나요?”
“비밀 통로는 총 4개인데, 여기 정보국 지하에서는 왕의 거처 안으로 연결됩니다. 폐하 위치를 몰라서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는데, 대사님이 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경은 몽베리스 산에 가셔서 신호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세요. 몽베리스 산 전망대에 말 두 필이 있습니다. 저희가 폐하를 데리고 나올 테니 강 맞은편에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세라비 님은 여기 계시면서 지하실 입구를 지켜 주세요.” 레이는 이렇게 말하고 세라비가 등에 고대의 검을 메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만약 오스틴 군이 여길 발견하면…” 레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실 수 있죠?”
세라비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레이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레이는 비밀 통로 쪽으로 뛰어들려다 말고 세라비를 돌아보았다.
"레이, 왕궁에는 너 말고 내가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왜요?"
"예전에 욘도로케랑 약속한 게 있거든." 세라비는 욘도로케에게 맹세했던, 절대 북쪽 나라 공주들의 눈에 레이가 띄지 않게 하겠다던 약속을 레이에게 설명했다. 레이는 피식 웃었다.
"참나, 욘도로케하고 싸움만 하신 줄 알았는데 언제 그런 약속까지 하셨어요?" 로브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둘러쓰며 레이가 말했다. "저도 그쪽 눈에 띄면 곤란해요. 하지만 제가 마법으로 폐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들어가는 게 맞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는 다시 통로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린도 재빨리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지하실 문과 비밀 통로 입구가 동시에 닫히자, 세라비는 지하실의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