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로스의 구출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레이는 비밀 통로로 들어섰다. 곰팡이와 축축한 흙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돌을 다져 만든 바닥은 오래 방치된 흙길로 이어졌다. 한때 횃불을 걸었을 낡은 고리가 벽에 간간히 붙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전에 만든 통로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칼베르도 이카리아와 마찬가지로 침략도 반란도 없었으니 이 통로는 아마 적어도 몇백 년은, 어쩌면 천 년 이상 내버려 두었을 거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레이는 낮은 천장들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구간들을 지났다. 통로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했다. 다시 돌이 깔린 바닥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왕궁의 지하였다.
레이는 몇 개의 계단과 적어도 백 년 전에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 통로들을 지나 가장자리에 녹이 슨 철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또다시 바닥과 벽이 좀 더 단단해 보이는 복도가 있었다. 철문 몇 개와 나무로 된 문이 연이어 나타났다. 갈수록 철문에 녹도 없고 나무문도 썩은 데 없이 성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교체한 것 같았다. 이 통로를 사용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미리 손을 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왕가의 문장이 중앙에 새겨진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갑자기 눈앞에 코트와 예복들이 나타났다.
그곳은 왕의 의복실이었다. 비밀 통로의 문은 의복실의 오랫동안 입지 않은 예복들이 걸린 안쪽 구석에 묻혀 있었다.
사계절용으로 정리된 격자 옷장이 방의 양 옆으로 줄지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모자나 장갑 등이 놓인 선반들과 큰 서랍장들이 있었다. 커다란 거울 세 개가 둘러쳐진 옷 입는 공간에는 푹신한 카페트와 백합이 조각된 스툴이 놓여 있었다.
레이는 코트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방을 둘러보았다.
‘왕인데 스승님 옷보다 화려한 게 한 벌도 없네.’
레이는 의복실에 붙어 있는 두 개의 문을 재빨리 확인했다. 한쪽은 욕실로 이어지고, 반대쪽은 침실인 듯했다. 레이는 침실로 통하는 문의 열쇠구멍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게로스는 화려한 기둥이 네 개 달린 침대 옆에 놓인 등받이가 달린 작은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묶여 있지는 않았지만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무장한 오스틴의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게로스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긴장하고 있었다.
레이는 지팡이를 맴도는 바람 하나를 문틈 사이로 날렸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천장 한구석에 은빛 꼬리가 재빠르게 하트 모양을 그리고 사라졌다.
‘아, 브리엘 부대사네.’
브레보뉴 숲에서 세라비가 은빛 바람을 보고 단번에 알아보았듯이, 이제 게로스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발렌도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의복실의 비밀 통로를 타고 왔나? 그런 와중에도 여유가 넘치네, 하트라니.‘
설마 세라비도 여기 온 것은 아니기를 그는 속으로 빌었다. 그의 동요를 눈치채고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뜨자, 게로스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태연하게 팔짱을 꼈다.
“너, 가서 테사 공주 불러와.”
경비병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왕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포로가 되어서도 이런 말투라니, 자신이 포로라는 것을 자각은 하는 건가? 하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이 머뭇거리자 게로스가 다그쳤다. “공주 성질 모르나? 지금 안 부르면 후회할 텐데?”
경비병 하나가 불쾌한 투로 말했다. “제독님이라고 불러!”
다른 경비병도 말했다. “내일이면 처형당할 놈이 끝까지 거만하군!”
게로스는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지금 내가 부르는 건 공주님이 기뻐하실 테니까 어서 불러와.”
다섯 명의 공주 전하들께서 모두 게로스에게 구혼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오스틴 국민은 없었다. 경비병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자가 죽기 싫으니까 테사의 구혼을 받아들이려는 거라면, 지금 당장 공주를 불러와야만 했다. 그것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일들은 그들의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경비병 한 사람이 주춤거리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게로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남아 있는 경비병에게 덤벼들었다. 경비병은 움찔하며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의자 다리가 미끄러지며 바닥을 긁는 소리와 동시에 그의 명치에 무언가 박히며 몸이 푹 꺾였다. 병사가 들고 있던 검이 바닥에 튕겼다.
첫 번째 경비병이 나가자마자 의복실에서 튀어나왔던 레이는 게로스가 이미 나머지 한 놈의 몸에 올라타 목에 검을 갖다 대고 있는 것을 보고 으쓱했다.
‘뭐야, 잘하네. 언제 배운 거람.’
레이는 게로스를 도와 재빨리 바닥에 쓰러진 경비병의 입을 막고 손을 뒤로 묶었다.
그들이 의복실로 빠져나가려는 찰나, 침실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무장한 오스틴 병사들과 함께 무릎길이의 어두운 초록빛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로브에 고대 문자와 함께 군의 계급을 상징하는 부채꼴의 줄무늬가 수 놓인 것으로 보아 오스틴 군 소속의 마법사임에 틀림없었다.
오스틴의 마법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그가 경악한 것은 방 안에 쓰러져 포박당한 경비병이나 손에 검을 쥐고 있는 왕 때문이 아니었다.
“너는 림락의…!”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림락의 미치광이!”하고 그는 쉰 목소리로 외쳤다.
레이의 손이 높이 들렸다. 천장과 침실 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치 지지대가 칼로 자른 듯이 뚝 잘리며 밑으로 떨어졌다. 묵직한 파괴음과 함께 파편과 먼지가 튀었다. 마법사는 이미 지지대 밑에 깔려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오스틴 전통어로 뭐라고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레이는 게로스를 끌어당겼다.
“빨리요!”
두 사람은 의복실로 뛰어들었다. 비밀 통로 문이 닫히기 전 레이는 의복실 벽과 천장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려 침실과 통하는 문 주변의 벽을 마구 무너뜨렸다. 무너진 천장과 벽이 부서진 가구와 함께 어지럽게 흩어지며 파편과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웬만큼 치우기 전까진 통로 문을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 레이가 말했다. “그래도 방을 부순 건 죄송합니다.”
“어차피 저 방 싫어했어요. 어서 갑시다!”
두 사람은 비밀 통로 안을 달렸다. 뒤를 쫓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레이의 말대로 잔해를 치우기 전까지는 오스틴은 의복실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었다.
미니스트렐의 지하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주위를 경계하던 세라비는 지하실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듣고 재빨리 벽 뒤로 숨었다. 지하실 문이 덜커덩하며 열리더니 오스틴 병사 두 명이 들어왔다.
세라비는 숨을 죽였다. 그들은 안쪽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 돌아섰다. 그들이 지하실 문을 열고 다시 나가려던 때, 쥐 한 마리가 병사의 발치에 튀어나왔다.
세라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아, 소리 지를 뻔했네.’
병사들은 뭐야 쥐잖아, 하고 다시 나가려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왜 그래?”
“그냥 잠깐만.”
두 병사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든 횃불이 벽에 그림자를 만들며 일렁였다. 세라비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한 손은 가슴에 대고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 그들은 저벅저벅 걸어 세라비가 숨어있는 벽까지 왔다. 횃불을 든 손이 높이 들리자, 벽의 그림자에 세라비의 모습도 같이 합쳐져서 반대쪽 벽에 드러났다.
“거기 누구냐!”
세라비가 검을 뽑기도 전에 첫 병사가 달려들었다. 세라비는 숙이고 비켜서며 검집으로 그의 턱을 쳤다. 병사의 검이 세라비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세라비는 검을 들어 가까스로 받아냈다. 손목이 얼얼했다. 실전으로 욘도로케와 결투도 했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세라비는 이제야 그 차이를 깨달았다. 욘도로케와의 결투는 상대의 항복을 위한 것이고, 이들과의 싸움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고대의 검의 미세한 떨림이 손바닥에 느껴지며 세라비의 등줄기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덤벼오는 적들의 움직임을 피하느라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병사가 뒤에서 덮쳐왔다. 세라비는 몸을 돌려 피하면서 훈련더미를 찌르듯이 검을 밀어 올렸다. 푹, 하고 말도 안 되는 탄성이 검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아…!”
생생한 감촉에 세라비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검이 스릉거리며 붉은빛을 내뿜기 시작했으나, 그 검은 더 이상 세라비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검을 떨어뜨린 세라비의 얼굴과 팔과 가슴에 병사의 피가 튀었다. 모든 감각이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병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른 병사가 소리를 지르며 덮쳐왔지만 세라비의 손에는 검도 무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발이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차가운 공기가 지하실에 밀려들었다. 게로스가 먼저 비밀 통로의 문을 열고 나왔다가 세라비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뒤이어 레이가 튀어나와 그대로 세라비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는 지팡이로 병사를 내리치고 세라비가 떨어뜨린 고대의 검을 집어 들어 순식간에 병사의 목덜미를 베었다. 병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레이는 얼굴에 튄 피를 닦지도 않고 세라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이제.” 레이는 세라비를 부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가요.”
세라비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지하실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너무 놀라서 자신의 뒤에 게로스가 같이 달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정보국을 나와 건물 그림자와 정원수들 사이에 몸을 숨기며 미니스트렐을 빠져나왔다. 쿠젤 강에 걸린, 난간이 일부 부서진 다리를 건너자 코린이 몽베리스 산에서 끌고 온 말 두 마리와 함께 무너진 상점가 골목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요! 싸움은 나중에!”
세라비가 게로스와 같은 말에 타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레이가 날카롭게 외쳤다. 코린과 레이가 먼저 같은 말에 오르자, 세라비는 게로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와 같이 말에 올랐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 끝자락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그들은 왕궁과 미니스트렐을 등진 채 말을 달려 파렌베르크 외곽으로 향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