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위에는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트루아벨을 출발한 이후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렌베르크에서 마차로 왔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말을 쉬게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잠도 거의 안 자고 식사도 말 위에서 했다.
3일 만에 처음으로 침묵을 깨고 레이가 말했다.
“이러다가 말이 먼저 죽으면 저희 걸어가야 해요.”
세라비는 레이가 자기 때문에 안전한 트루아벨을 떠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칼베르나 게로스 입장에서도 자기보다는 레이가 더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다. 레이는 항상 자신만만하고, 강하고, 판단력도 실행력도 빨랐다. 그가 보여준 마법은 아마도 그가 가진 능력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래서 세라비는 레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같이 와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가 같이 간다면, 어떻게 해서든 슐로스 루와얄까지 갈 수 있을 것이었다.
파렌베르크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피난민들로 지나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검은 먼지가 내려앉은 얼굴로 울면서 걷고 있었다. 세라비와 레이가 앞서 마주쳤던 사람들은 그래도 살림살이라도 좀 챙겨서 수레 등에 싣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지만, 파렌베르크에 가까워지면서 마주친 사람들은 탈 것도 없이 뒤늦게 몸만 빠져나와 걸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세라비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참담해서 눈을 돌리고 말았다. 레이도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을 치지 않도록 길가로 조심스럽게 말을 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자 어린아이들을 업고 안고 걷던 사람들은 좀 태워달라는 듯이 그들을 향해 아이들을 내밀어 보였다. 세라비는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트루아벨을 출발한 지 닷새 되는 초저녁 무렵 파렌베르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몽베리스 산으로 향했다. 몽베리스 산은 슐로스 루와얄에서도 보이는 산이었다. 세라비와 레이는 오스틴 군이 혹시 이 산에 숨어있지 말기를 바라며 어둠이 깔리는 산길을 따라 걸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수정 테라스에서 차를 드시는 임금님을 멀리서 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자주 찾는 전망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물론 거기에서 게로스가 보일 리는 없었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정 테라스가 보였으므로 파렌베르크 사람들은 카마가 보름달로 뜨는 저녁이 되면 폐하가 계신 곳을 바라보러 일부러 산의 전망대에 오르곤 했다.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파렌베르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검은 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견고한 파렌베르크 성벽에는 검은 얼룩 같은 것들이 보였다. 레이는 그것이 대포에 맞아 무너진 부분임을 알아보았다.
어디선가 묵직한 폭발음이 들렸다. 무언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와 돌더미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비명 소리 같기도 하고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한 날카로운 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아…!!!”
세라비는 전망대 바닥에 꿇어앉아 흐느꼈다. 슐로스 루와얄의 높은 탑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스틴의 국기였다.
참담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이의 뺨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산 위인데도 바람에는 바다의 짠내가 섞여 있었다. 소금물과 쇠와 피가 뒤섞인 냄새였다. 그는 분명 말 위에 있었는데도 갑자기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파도 위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화염과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도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감각을 집어삼켰다.
세라비가 돌아보니 레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등에 매달려 있었다.
“레이!”
세라비는 레이를 말에서 내려 주고 부축했다. 레이는 누군가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는 세라비의 손을 뿌리치고 나무 밑으로 기어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세라비는 레이에게 달려가 등을 두들겨 주고 나무에 기대게 한 다음 옷 여밈을 끌러 주었다. 레이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토하기를 반복하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세라비는 레이의 이런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레이는 그동안 여행하면서 아픈 적도 없었고 심지어 운 적은 더더욱 없었다. 파렌베르크가 불타는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러는 것일까?
“레이! 왜 그래? 괜찮아… 진정해!”
이미 아무것도 괜찮은 것은 없었지만 세라비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흐느끼며 몸부림쳤다. 레이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세라비는 레이를 끌어안고 자신도 울음을 터뜨렸다. 불길과 매캐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렌베르크, 왕궁에 걸린 오스틴 국기, 몸부림치는 레이, 연기에 실린 화약 냄새, 멀리서 또 펑 하고 터지는 소리… 모든 것이 악몽보다 더 악몽 같았다.
레이의 호흡이 조금씩 고르게 바뀌었다. 세라비는 레이가 더 이상 토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부드러운 풀 위에 눕혀 놓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마야나 스승님은 레이가 울면 어떻게 해 주셨을까? 그러나 레이는 라마야나 앞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을 거라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레이는 잠이 들었다. 세라비는 겉옷을 벗어 레이에게 덮어주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귀신 여울에서 밤새도록 우는 세라비를 기대게 해 주고 따뜻한 불을 밝혀 주던 레이는 이제 무서운 것을 본 어린애처럼 통곡하며 울다가 지쳐서 세라비 앞에 잠들어 있었다.
세라비는 프티 몽텔리에서 레이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레이는 마치 세라비와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세라비를 따라왔다. 레이가 아니었다면 칼베르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라비도 레이첵도 플로르 왕자도 모두 레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레이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었어,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그렇게 의지하는 것에 반해 레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음을 세라비는 깨달았다. 물론 본인의 무심함도 있었다. 레이 성이 브리엘이라는 것도 게로스가 불러서 처음 알았을 정도였으니까.
세라비는 레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궁금했고 걱정스러웠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이가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진작 다 떠들어댔을 것이고, 말하기 싫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게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무언가와 관련된 거라면, 죽을 때까지 묻지 않으리라고 세라비는 결심했다.
레이는 나쁜 꿈을 꾸는 것처럼 뒤척였다. 그들은 산을 넘으며 서로 자는 모습 따위는 며칠씩이나 보아왔지만 레이는 잘 때는 쿨쿨 잘만 잤었다. 이렇게 끙끙거리며 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세라비는 레이의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레이는 항상 손수건을 가지고 다녀서 세라비가 울거나 뭘 흘리거나 긴장해서 땀을 흘릴 때도 바로 손수건을 건네주곤 했다.
세라비는 레이가 토하거나 울지는 않는지 간간히 살피다가 나무에 기댄 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레이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세라비는 눈을 떴다. 레이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레이, 괜찮아? 이젠 안 아파?”
레이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라비는 레이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제 가요. 폐하 찾아야죠.”
“성이 함락되기 전에 퇴각했을 수도 있잖아.”
“왕궁 근처에 가서 위치를 찾아보고, 안에 없는 것이 확인되면 칼베르 부대를 찾아서 합류하도록 하죠.”
세라비는 게로스의 위치를 찾는다는 말에 차마 다음 질문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레이는 세라비가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채고 대답해 주었다.
“죽었어도 찾을 수 있어요. 시체 위치도.”
세라비는 고개를 들어 레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왠지 한기가 느껴져 떨었다.
레이는 숲의 풀이 많은 곳에 말을 매고, 세라비에게 가자고 끌어당겼다. 세라비는 반쯤 무섭고 반쯤 얼떨떨한 기분으로 레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