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라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파렌베르크의 거리에는 낙엽이 세찬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외부에 내어놓던 테이블과 의자들이 모두 안으로 들여진 강변의 거리와 골목에서는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세운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왕의 집무실과 연결된 회의실에는 게로스와 코린, 세드릭, 앙투안과 장 바티스트가 역시 굳은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왕실 보석들과 국가기록이 든 금고는 루브론으로 옮겼습니다.” 앙투안이 말했다. “클로드 에티엔 경도 루브론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게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엘로이즈 레모르스 사건 이후 자신이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클로드 에티엔이 왕위를 이어받는 경우를 준비해 왔다. 클로드 에티엔에게 정무국장을 맡기고 조엘린 부인에게 내궁 업무를 넘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죽고 파렌베르크가 적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클로드 에티엔을 중심으로 다시 반격이 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정말 최후 중에서도 최후의 대안이었다.
“아스트리드 대사는?” 게로스가 물었다.
“떠나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왕궁으로 오고 계십니다.”
장 바티스트는 이 상황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폐하, 루스카 용병 부대가 포르앙블루에 도착했습니다. 생토네르에서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고 발렌도르와 루브론의 후방 부대를 올라오게 한다면 충분히 오스틴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굳이 스칼하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게로스는 장 바티스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포르 칼레즈의 상황을 보고받은 후에 게로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확률도 낮은데 승리한다 해도 피해가 너무 커. 포르 칼레즈에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총력을 다했지만 막상 붙어보니 전력 차이가 너무 컸어. 오스틴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어.”
게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장 바티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장 바티스트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주권 포기 가능성이 있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그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
“…스칼하븐의 군사 지원을 받는 게 오스틴을 몰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야.”
게다가 곧 겨울이 오고 있었다. 포르 칼레즈 함락 이후 발생한 수많은 난민들은 주변 도시들에서 최대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축해 둔 식량과 물자로 봄까지 버틴다 해도 장기전이 되면 답이 없었다. 게로스는 계속해서 다음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세드릭이 말했다. “하지만 라그나 공주가 칼베르 왕비가 되면, 우리나라를 결국 속국으로 만들려고 할 겁니다.”
스칼하븐의 에르다 여왕은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칼베르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섬밖에 없는 해양국가인 스칼하븐에게 있어서는 칼베르처럼 넓은 평야와 자원을 가진 나라가 탐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베르와 비슷하게 평야와 숲이 많은 리스코바가 전쟁에서 스칼하븐이 아니라 오스틴 편을 들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스칼하븐이 리스코바에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칼베르가 쉽게 틈을 내주지 않자 에르다 여왕은 칼베르가 무려 2천 년 전에 스칼하븐의 남부에 살던 부족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므로 우리는 원래 한 나라가 아니냐는 기상천외한 이유를 들며 협력 이상의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그러니 라그나가 게로스의 왕비가 되겠다며 오스틴과 싸우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저 좋은 명분일 뿐이었다. 이 전쟁은 라그나의 전쟁이 아니라 에르다의 전쟁이었다.
게로스는 코린에게 물었다. “토르켈 대공 쪽은 어떻지?”
“스칼하븐 외해 지역 영주들은 대부분 토르켈 대공을 지지하고 있고, 브리엘가르트 여론도 오래전부터 좋지 않습니다. 다들 전쟁에 지쳤고 토르켈 대공은 반 라그나 감정을 계속 부추기고 있죠.” 코린이 대답했다.
“토르켈 대공이 과연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 앙투안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그는 애초부터 스칼하븐의 왕좌가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라그나가 스칼하븐에서 사라져 주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적극 협조할 거야. 에르다 여왕은 노쇠했고 자긴 아직 정정한 데다 아들 카이렌은 권력욕이 없으니 자기가 왕이 되던가 아니면 카이렌을 앉혀놓고 섭정을 하겠지.”
세드릭이 외쳤다. “하지만 라그나 공주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왕비가 되어도 스칼하븐 왕위를 포기할 사람이 아닙니다. 토르켈 대공이 자기 자리를 뺏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칼베르 왕비가 된 다음에는 달라지지. 라그나는 결국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게로스는 7년 전 자신의 대관식에서 오스틴의 다섯 공주와 닥치는 대로 육탄전을 벌이던 라그나 공주를 떠올렸다. 그녀는 집요하고 포기를 몰랐다. 그녀는 게로스에게 집착해서 7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국혼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게로스만 쳐다보느라 서른이 넘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오스틴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게로스에게는 집요한 라그나도 통제 가능한 대상이었다. 물론 라그나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고려해야만 했으므로 라그나와의 국혼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스칼하븐을 급히 막아야 하면 오스틴 공주들 중 야심 없고 가장 게로스 말을 잘 들을 오스틴의 둘째 공주 레이첼을 맞이할 생각이었고, 오스틴을 급히 막아야 하면 라그나를 불러들이면서 토르켈 대공을 부추겨 라그나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토르켈 대공은 게로스의 부추김에 넘어가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피로한 스칼하븐 귀족들에게 “라그나는 칼베르 왕에게 반해서 나라를 통째로 지참금으로 바치려고 한다”, “우리는 라그나의 구혼 전쟁의 피해자다”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아주 잘 먹히고 있었다.
코린은 세르비카 대사님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게로스는 자기 자신조차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그가 심각하게 세르비카 대사와 사랑에 빠졌다 해도, 그는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폐하는 결국 세르비카 대사를 포기하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르비카 대사를 계속 곁에 두려면 왕의 정부가 되는 것뿐인데, 대사가 그런 위치를 받아들일 리도 없고, 이카리아에서 자기네 외교관을 우리 왕이 첩으로 데리고 있는 것을 알면 외교 문제가 되겠지. 무엇보다도 라그나가 세르비카 대사의 존재를 알면 살려둘 리도 없다. 그러니 세르비카 대사는 자의든 타의든 결국 떠나는 것이 수순이다.’
게로스는 접견실로 향하며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냐고 묻던 세라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발렌도르로 보내 놓고 며칠도 안 돼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하다니, 나는 연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최악이다,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지금 같은 때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발렌도르로 세라비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파렌베르크와 발렌도르 사이에는 전령이 계속해서 오가고 있으니 세라비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세라비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이 위급해서 스칼하븐 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어 미안하다고? 아니면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곁에 있어달라고?
‘이제 쓸 수 있는 카드가 나 자신밖에 안 남았다. 오스틴과 끝까지 싸우는 것보다, 라그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피해가 훨씬 적어. 하지만 세라비는 날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
세라비가 다시는 자신을 안 보겠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면 세라비는 파렌베르크에 돌아오지 않고 바로 이카리아로 가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는 세라비의 기억 속에 영원히 쓰레기 같은 놈으로 남을 것이다. 배신당한 쓰라림과 함께.
세드릭이 스칼하븐 대사의 도착을 알렸다. 게로스는 접견실로 들어섰다.
‘세라비는 트루아벨에 안전하게 머물게 하다가 이카리아로 돌려보내야 해. 내가 세라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