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세라비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팔레 에클라의 돌기둥 사이로 해풍에 실린 비 냄새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공기 안에는 소금기와 해조류의 향이 살짝 배어 있었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 너머 정원에는 비에 젖은 올리브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세르비카 경은 30년 동안이나 보아 왔던 왕궁 정원의 익숙한 풍경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플로렌틴 왕비의 통곡 소리가 어두운 왕궁 복도에 무겁게 내려앉고 있는 가운데, 마르셀 왕은 궁을 떠나는 세르비카 경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폐하, 플로르 전하는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행방을 알아내겠습니다.”
마르셀 왕은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세르비카 경은 본인도 아들과 조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르셀 왕 앞에서는 왕자의 실종에 대한 자신의 책임만 입에 올렸다. 그와 같은 신하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마르셀 왕은 생각했다.
약 두 달 전, 세르비카 저택에 퀼테베르 신전의 사제로 보이는 단정하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첼레라고 했다.
그는 세르비카 경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세르비카 경은 편지를 읽어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템푸스 아르카라는 곳에서 보낸 플로르 왕자의 편지였다.
세라비와 레이를 칼베르로 가라고 포르트메르로 등 떠밀어 보낸 후, 아들인 레이첵도 그들을 따라간 것도 모자라서 플로르 왕자까지 거짓말하고 궁을 나간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세르비카 경은 플로르 왕자의 시종 코토란이 절대로 왕자가 칼베르로 간 것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왕자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처럼 꾸미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애가 타고 있었다. 이들이 칼베르에 도착해서 뤼넬을 가지고 뭔가 성과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의 매일매일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마르셀 왕과 플로렌틴 왕비가 “왕자가 수도원에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 편지에는 왕자의 필체로 “저희는 템푸스 아르카를 거쳐 칼베르로 향하는 길입니다. 반드시 이카리아가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래 박혀 있는 것은 틀림없이 플로르 왕자의 서명이었다.
플로르 왕자의 편지와 동봉된 세라비의 편지에는 왕자님이 저희를 격려하기 위해 동행을 자청하셨고 의젓하게 저희를 이끌고 계신다는 되도 않는 거짓말이 마구 쓰여 있었다.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의 필체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세라비의 편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세라비 이 녀석! 아무 말이나 하는 걸 보니 상황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군.”
이윽고 맨 뒷장에 ‘누나가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감시차 따라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레이첵의 편지가 나타났다. 세르비카 경은 잠시 동안 아들의 아름다운 필체를 감격에 겨워 바라보고 있었다. 순하고 얌전한 줄만 알았던 가출한 아들놈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세르비카 경은 중얼거렸다.
“이놈의 말썽꾸러기 녀석! 돌아오면 머리를 박박 밀어서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하고 말 테다.”
세르비카 경은 당장 플로르 왕자와 세라비의 편지를 국왕에게 보였다. 왕실 마법사가 편지가 쓰인 종이를 보고 “이것은 바람나무 종이라는 것으로 템푸스 아르카에서만 생산, 소비되는 것입니다.”라고 증언해 주었다.
마르셀 왕과 왕비는 수도원에 가 있던 왕자가 그새 사신단을 따라갔냐며 놀라워하면서도 걱정에 휩싸였다. 이윽고 템푸스 아르카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왕실 마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공표했다.
“왕자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브뤼메 산맥 한가운데에 있는 신들의 도시로 직접 찾아갔소. 구국의 결단을 한 왕자를 위해 오늘부터 모두 단식하며 신들에게 기도하도록 하시오!”
세르비카 경은 기도는 좋지만 단식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카레이유의 고리타분한 귀족들이 왕이 시키는 대로 단식을 할 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단식이 끝날 때쯤에는 뭔가 기적적인 사건이 발생해 주어야 하는데, 세라비가 그때까지 칼베르에 도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첼레라는 젊은이의 말로는 지금쯤 칼베르 땅에 도착하긴 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상 파렌베르크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터였다.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가 어렸을 때 뭔가 심부름을 시키면 하루 종일 어디 이상한 데로 새서 놀다가 시킨 건 다 까먹고 저녁이나 돼서 들어왔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성인이니 이젠 제발 그러지 말아 다오, 하고 속으로 빌었다.
첼레는 템푸스 아르카로 돌아갔다. 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진행도 안 되었던 단식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왕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팔레 에클라에는 왕자 일행이 혹시 칼베르에 가서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닌지 의견이 분분했다. 국경을 막고 있는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이카리아 사람들에게 겁을 주느라 “칼베르는 지금 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었다” 고 하는 것을 믿는 일부 신하들은 플로르 왕자가 칼베르에 가서 죽은 게 아니냐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 스칼하븐 대사가 포르트메르에 주둔하던 스칼하븐 군의 일부를 끌고 왕궁에 나타나,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으니 자기네 편을 들어 파병을 하던가 군대가 없으면 물자라도 지원하라고 최후의 통첩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틴 측도 마르벤에 있던 군사들 중 가장 무섭고 험악하게 생긴 놈들을 골라 전차까지 끌고 수도에 나타났다. 마르셀 왕은 놀라서 쓰러지고 말았다. 세르비카 경은 그들을 설득하여 일주일 내에 결정을 내려 통보할 테니 왕궁 앞에서 이러시지 말라고 돌려보냈다. 즉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신하들은 이미 대부분 오스틴 파, 스칼하븐 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칼베르에 사신 따위를 보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한 세르비카 경을 외교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시키도록 왕을 압박했다.
“플로르 전하가 나라를 구하러 가셨지만, 돌아오실 나라도 없어지게 생겼는데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은 왕이 세르비카 경을 해임하겠다고 공표할 때까지 아우성을 쳤다. 왕자의 실종까지 책임지려면 해임 갖고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르셀 왕은 결국 세르비카 경의 해임에 동의하고 말았다.
세르비카 경은 스무 살에 왕궁 공무관으로 들어온 이후 평생을 바쳐 일한 팔레 에클라를 쓸쓸하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평생을 바쳐 쌓은 자신의 지위와 명성, 권력, 그리고 아들과 조카까지 모두 잃었다.
갑자기 의정실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오전 내내 세르비카 경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해임 결정을 반대하며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카 경은 “이미 다 끝났는데, 그만들 하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신하들이 아니었다. 국경 지대에서 온 전령들이었다.
“세르비카 경! 돌아오시오!”
마르셀 왕이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세르비카 경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더 커지는 것을 듣고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포르트메르와 마르벤이 열렸습니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모두 철수했습니다!” 전령들이 외쳤다.
세르비카 경은 두 손이 벌벌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체…? 그럼… 이제 칼베르에 갈 수 있게 된 겁니까!”
전령들은 한꺼번에 외치고 있었다. 세르비카 경은 그들이 마구잡이로 외치는 통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두 국경 도시를 통해 칼베르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피난민들이요!”
세르비카 경은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르셀 왕은 달려와 세르비카 경의 두 손을 잡았다.
“세르비카 경, 가지 마시오…! 이제 우리나라는 끝났소! 칼베르가 오스틴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오!”
세르비카 경은 왕궁 밖에 발도 내딛기 전에 도로 복직되었다. 오스틴 편을 들던 신하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스칼하븐에 지원하자고 하던 신하들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세르비카 경은 의아해서 생각했다. ‘칼베르가 오스틴의 공격을 받는 중이라면 왜 마르벤의 오스틴이 철수했을까?’
‘오스틴이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나 보군. 마르벤 주둔군까지 지원하러 불러들인 모양이구나.’ 세르비카 경은 생각했다. ‘그러면 스칼하븐은 왜 포르트메르에서 철수했을까?’
세르비카 경은 이윽고 깨달았다. ‘오스틴이 칼베르를 장악하는 바람에 스칼하븐이 위협을 느끼고 철수한 게 아니라면, 스칼하븐도 칼베르로 오고 있다는 뜻이다.’
세르비카 경은 다시 복귀한 책상 위에서 차가워진 두 손을 꼭 쥐었다.
‘이대로면 칼베르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칼베르는 이제 오스틴과 스칼하븐 두 나라의 전장이 되겠구나. 아니면 칼베르가 오스틴 퇴치를 위해 스칼하븐과 공조를 꾀하는 것일지도… 후자가 나으련만.’
마르셀 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르비카 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르비카 경은 아무도 아무런 결정을 할 생각도 하지 않는 의정실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세라비가 어디쯤 있을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뤼넬은 어디다 팔아먹고 칼베르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세라비!’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