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구두장이가 복원한 엘긴 대성당

엘긴 사람들의 중세 코스프레

by 마봉

8월 13일, 여행 31일째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제대로' 완주하고 찾아간 인버네스의 숙소에서는 친절한 여주인이 내 방에 히터도 미리 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조지 심슨 할아버지가 갖다 놓고 갔을 나의 캐리어 가방도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산길을 걷는 여행은 끝났다. 스코틀랜드 동부 여행은 도시와 마을 위주로 편하게 조금씩 돌아다니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페스티벌이 끝나기 전에 에딘버러로 가서 아주 그냥 뽕을 뽑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사실 동부에서는 스카이 섬처럼 어딘가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해 놓은 곳이 없었다. 인버네스도 어제저녁에 밥 먹으러 나가서 좀 돌아다녀 보니 딱히 볼 건 없었고 네스 강 산책은 이미 그레이트 글렌 웨이 걸어오면서 다 했으니 이제 근교의 다른 곳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할 차례였다. 사실 캐리어 가방을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나같이 게으르고 체력 거지인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처럼 가방 딜리버리를 해줄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거점을 두고 당일치기나 1박 2일 정도로 찔끔찔끔 다니는 정도가 나한테는 딱 맞았다.


한국에서 미리 사 갖고 온 브리티시 레일 패스가 내일인 8월 14일에 만료되기 때문에 무조건 기차를 타야겠다고 결심하고 아침을 먹자마자 인버네스 역으로 갔다. 역에 도착해서 주머니와 지갑을 뒤져 보니 레일패스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지갑 속에 넣었다가 비 맞고 찢어질까 봐 어딘가에 아주 고이 잘 넣어 두었거나 아니면 영수증들이랑 같이 쓰레기통에 버린 거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하는 짓이 글치 뭐. 이런 것도 안 챙기고 기차 타겠다고 기차역에 온 나 자신의 븅신 같음을 탓하며 한참 동안 멍하니 인버네스 역 안에 앉아 있었다.

인버네스 이스트게이트(Eastgate) 쇼핑센터의 돔형 천장과 구조물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가본 엘긴

기차역에 왔으니 기차는 타야겠고, 이왕 내 돈 내고 갈 거라면 돈 적게 들게 가까운 곳으로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지도를 보니 아주 멋진 대성당의 폐허로 유명한 엘긴(Elgin)이라는 지명이 눈에 띄었다. 일단 이름이 왠지 마음에 든다. 발음이 좋다. 엘긴. 게다가 왕복 11파운드로 요금도 비싸지 않았다. 바로 기차에 올랐다.

엘긴 중심가 광장의 분수. 피라미드 모양의 구조물은 엘긴의 역사와 건물들을 새겨 놓은 기념용 브론즈 플라크(기념 조형물)

엘긴은 생각보다 크고 깨끗한, 왠지 중산층이 살 것 같은 인상의 동네였다. 집 열 채도 안 되는 시골 촌동네만 보면서 왔더니 하이 스트리트에 쇼핑몰까지 있는 엘긴 같은 동네가 어마어마해 보였다.


관광안내소 바로 옆이 엘긴 대성당인데, 오늘따라 그 옆 공원의 빈터에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모여 우글거리고 있었다. 동네 장이라도 서나? 하고 가서 봤더니 '바데녹의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버컨 백작이 엘긴 대성당에 불을 지르고 도시를 초토화시킨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여 동네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중세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행사였다.


바데녹의 늑대

대체 남의 나라도 아닌 자기 나라의 멀쩡한 도시를 초토화시키다니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할까? 미친놈이니까 한다. '늑대'라는 별명이 붙은 버컨 백작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이름: 버컨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Alexander Stewart, Earl of Buchan)

별명: 바데녹의 늑대 (Wolf of Badenoch)

시대: 14세기 스코틀랜드

아버지: 로버트 2세(Robert II of Scotland)

주요 거점: 로킨도르브 성(Lochindorb Castle) -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 위에 지어진 성. 아무도 못 건드림.

특징: 미친놈인데 정치적으로는 꽤 유능했다고 함

즉, 그는 왕자 출신의 문제아였다. 어느 정도로 문제아였냐면,

법: 안 지킴ㅋ

교회: 무시함ㅋ

약탈: 일상ㅋ

불태움: 취미 수준ㅋ

거의 '왕족 버전 산적 두목'


14세기 후반 스코틀랜드는 중앙 권력이 아직 약했다. 그래서 왕이 아들들에게 넌 북부, 넌 동부 이런 식으로 잘잘이 나눠 통치를 맡겼다. 버컨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는 로버트 2세의 10명쯤 되는 아들들(결혼을 많이 해서 아들 부자였다) 중 하나로 하이랜드 북부를 거의 자기 왕국처럼 통치했다.


그는 여러 가지 미친 짓을 많이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엘긴 대성당 방화 사건이다. 그는 원래 유피미아 로스(Euphemia Ross)라는 귀족 여성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마리오타 맥케이(Mariota Mackay)라는 다른 여성과 동거를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불법 관계로 간주하고 그를 교회에서 파문했다.


1390년, 파문에 빡친 버컨 백작은 병력을 모아 엘긴으로 진군했다. 엘긴 시내는 그에 의해 대부분 불타버리고,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던 엘긴 대성당은 이때 전소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즉 "나를 파문해? 그럼 너희 중심지 없애줄게ㅋ"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확실히 한 것이었다.


엘긴의 중세 체험 행사

엘긴 공원 플레이그라운드에 둘러쳐진 중세 체험 텐트들

공원에는 중세 코스프레 중인 마을 사람들이 텐트를 쳐 놓고 중세 옷, 중세 무기, 그릇, 갑옷, 고문도구처럼 생긴 무기들(...)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음식 장만, 말 돌보기, 갑옷 전시, 나무 손질하기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중세판 취사도구들(교수대 아님)
무기들인 것 같다 혹은 고문도구거나
문장학(heraldry) 전시 - 가문 내 서열, 문장에 쓰이는 패턴들, 모피와 십자가, 사자 문장 모음
노란색 체커 무늬 서코트(surcoat)를 입은 중세 병사 / 긴 원피스(kirtle)와 베일을 쓴 중세 여성
미트라(mitre)를 쓴 주교, 체인메일 후드를 입은 병사, 파란색 누빔 갑옷을 입은 병사, 도끼를 든 병사, 헬멧과 두꺼운 튜닉을 입은 병사 등등등

아이들은 대주교님의 지시에 따라 텐트들을 돌며 체험을 한 후에 광장에 모여 어린이 군대를 결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드디어! 어린이 군대가 광장에 모였다.

어린이 군대가 모여 아저씨한테 설명을 듣는 중(이미 신남)
대주교님의 명령으로 어린이 군대가 모인다!

어린이 군대는 나름 무지 진지했다! 손에는 검과 활을 들고 종이 투구까지 쓰고 있었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자 어찌나 진심을 가지고 버컨 백작을 때리는지 백작 역할 하는 아저씨가 불쌍할 정도였다. 아저씨 오늘 알바비는 넉넉하게 받아 가셨길...


폐허마저 장엄하고 화려한 엘긴 대성당

성당의 동쪽 끝, 성가대석 뒤. 위에 둥근 로즈 윈도우(Rose Window)의 뼈대가 보인다. 원래는 이 안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었다. 기둥과 창을 반복해서 올린 고딕 아치.

1224년에 지어진 엘긴 대성당은 스코틀랜드 북부 최대 규모 성당 중 하나로서 '북쪽의 등불(Lantern of the North)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한 종교와 권력의 중심지였다. 그랬다가 위에서 얘기한 대로 1390년에 바데녹의 늑대 이 인간이 와서 불을 질러 거의 전소되었다.


그 후 15세기에 다시 돈 들여 복원하여 한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성당인 엘긴 대성당은 관리하는 이 없이 방치되었다. 지붕은 붕괴되고, 돌은 떼어가서 다른 건물에 쓰이는 등 몇백 년간 버려졌던 엘긴 대성당은, 19세기에 와서 동네 구두장이 존 섕크스(John Shanks)의 손에 복원되기 시작했다.

엘긴 대성당의 역사를 기록한 안내문

그는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혼자서 수십 년 동안 폐허나 다름없는 성당 안의 잔해를 치우고 돌조각 하나하나의 먼지를 털어내며 복원했다. 그리고 복원이 좀 더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에게 홍보하여 오늘날의 엘긴 대성당의 모습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 후 복원된 대성당의 제1호 관리인으로 취임했으니 그야말로 엘긴 대성당과 함께한 일생이다.

성당 외부와 회랑(클로이스터) 부속 건물들과 묘지
성가대석 측면과 벽감 근처
고딕 건축 특유의 리브 볼트(Rib Vault) 천장. 하중을 분산해서 천장을 더 높게 지을 수 있다.
측면 예배실 입구와 무너진 리브 볼트가 드러난 모습
HIC IACET IONES DONALDSON MERCHANT BURGES DE ELGIN QUI OBIIT - 엘긴의 상인이자 시민권자 존스 도널드슨이 여기 잠들다

엘긴 공원의 평화로운 호수

엘긴 대성당은 복구 안한 채로 내버려 뒀더라면 인류의 손해일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왔는데, 날씨는 정말 지독하게 춥고 공원의 중세 체험장 텐트가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기차 시간 때문에 엘긴을 떠나야 했지만, 충동적으로 고른 여행지 치고는 꽤 괜찮은 체험이었다. 대성당은 아름답고, 중세 체험장과 어린이 군대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짐을 뒤져보니 레일패스는 캐리어 안에 고이 잘 모셔져 있었다. 레일 패스를 안 갖고 나온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엘긴에 다녀왔고 마침 중세 체험 행사 하는 날이라 좋은 구경도 했으니 멀쩡한 패스 두고 쌩돈 11파운드를 들인 것을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라고 정신승리중). 원래 생각지도 못한 여행이 더 재미난 법이다. 그것이 P의 여행이니까(끄덕).

오늘 여행 경로 인버네스 - 엘긴 (지도출처 Google Maps)


토요일 연재
이전 26화그레이트 글렌 웨이, 대망의 마지막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