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뿐 아니라 눈알도 잃을 뻔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평범하지 않은 글의 서두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김포공항 국내선 사무실에서 혼자 당직근무 중이었다. 이제 나가는 건 다 나갔고, 들어오는 비행기 두어 대만 더 받으면 퇴근이었다.
당시 나는 인천공항에서 7년 동안 뛰어다니다가 이직하여 김포공항 국내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근무지를 옮겼을 때의 기분이란... 뭐랄까... 서울시청에서 일하다가 남해에 있는 섬 읍사무소에서 일하는 기분이라고 비유하면 맞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김포공항이 몇 해에 걸쳐 꾸준히 리뉴얼을 해서 꽤 이뻐졌지만 당시에는 아직도 바닥에 올록볼록한 리놀륨 바닥 깔려 있고 천장은 낮고 조명도 어둡고 출발장 들어가면 커피 한잔 마실 데도 어정쩡한, 정말 우울한 곳이었다. 사무실 구역은 이것보다 더 했다. 오픈한 지 10년도 안된 인천공항(당시 기준)에서 일하다 온 나로서는 충격이 꽤 컸다.
국제선만 띄우다가 국내선 일을 하게 되었으니 뭐 할거 있겠어? 라고 만만하게 생각했던 나는 한 달 만에 몸무게가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그건 좀 그립다). 일단 국내선은 비행기가 아니었다. 그냥 하늘을 나는 고속버스 같은 거였다. 국제선 특히 장거리 국제선(그전에 일하던 곳)과 승객층도 승객 성향도 너무 달랐고, 물론 국제선에서 하던 거 여기서는 안 해도 되는 건 많았지만, 대신 국내선에서만 발생하는 특수함이 있었다. 어떤 것인가 한번 보도록 하자.
국제선은 타기 위해서 며칠 전부터 준비하고, 짐 싸고, 이것저것 챙기고 나오는 반면 국내선은 그냥 어제 결정해서 오늘 나오는 사람 태반이다. 그리고 비행기라는 자각도 좀 없다. 그래서 제주도 가서 과일 깎아먹겠다고 과일칼 배낭에 넣어 오는 사람은 뭐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고 액체류 제한은 없지만 그 외의 금지물품(칼, 뾰족한 거, (부치는 가방 속의)스프레이 등)은 고속버스 탈 때 하고 똑같이 그냥 들고 오는 사람 많다.
제주공항 근무자들은 아주 이골이 났을 텐데, 제주도 여행하고 오는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짐들을 진짜 많이 갖고 온다. 감귤류 과일 박스, 해산물 들어있는 스티로폼 박스 등등 진짜 다 똑같이 생겼다. 이런 짐들은 백택에 쓰여있는 자기 이름 안 보고 자기 건 줄 알고 가져가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래서 김포 도착하면 짐 찾을 때 직원들이 이름 확인하고 가져가라고 소리 지르면서 다니는데, 개인 여행객들은 그래도 이 말이 좀 먹힌다. 하지만 단체승객들은 여러 개를 한꺼번에 빼다 보니까 자기네 단체 귤박스 아닌 것도 그냥 막 가져가 버린다. 그러면 원 주인은 자기 귤 없어졌다고 또 항공사 찾아온다.
그럴 때 항공사인들 뭐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럼 어떻게 할까?
정답 : 모든 승객에게 전화를 다 돌려본다.
귤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갈치 같은 거 들어있다고 하면 항공사 직원은 울면서 전화한다. 나 같은 경우 그 비행기 탑승했던 모든 승객에게 전화를 다 돌린 다음 겨우 갈치와 전복 들어있는 박스를 찾아냈다. 원 주인과 가져간 사람 사이에 알아서 주고받으시라고 연결까지 해준 다음 손을 터는데, 이 과정에서 전복이 상했다며 보상받을 수 없냐고 연락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보세요 그걸 왜 항공사가 책임지나요. 잘못 가져간 사람한테 얘기하셔야죠.
기내에 놓고 내리는 물건을 LB라고 부른다. 국제선은 여행 갔다가 이것저것 많이 사 오는 바람에 면세품이나 기념품 많이 놓고 내리고, 너무 피곤했는지 여권도 종종 놓고 내린다. 진짜 짜증 나는 건 베트남 노선에서 일부러 버리고 가는 듯한 논라(베트남 전통 모자) 제발 왜 이거 안 가져가세요. 손님 꺼라 버리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보관하다가 일정 기간 지나면 버리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베트남 갔을 땐 기분이 동해서 사서 쓰고 다니다가 한국 오니까 손에 든 것도 많고 귀찮아서 그냥 두고 가는 게 틀림없다.
김포-제주 노선은 어떠한가? 제주공항에서 샀던 감귤초코 선인장초코 이런 거 잘 두고 간다. 착불로 보내달라는 사람도 있지만 안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식품은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3일 안 넘기고 버린다. 김포공항 제주공항 직원들이 신나서 먹을 것 같은가? 지겨워서 쳐다도 안 본다.
자, 그렇다면 전화벨이 울린 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퇴근 빨리 하고 싶어서 리포트 미리 써놓고 룰루랄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통제실에서 온 전화였다.
"기내에서 클리닝쿠폰 나간 승객 있으니까 미리 준비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클리닝 쿠폰이란 기내에서 음료나 기내식 제공하다가 뭐 엎지르던가 해서 항공사 과실로 의류 세탁이 필요한 승객에게 나가는 쿠폰이다. 별건 아니고 비행기 내려서 그걸 지상직원에게 주면 계좌번호 받고 돈을 부쳐주던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돈봉투를 준다.
그런데, 이번 케이스는 좀 달랐다. 승객이 너네 잘못인데 자기가 왜 세탁을 맡겨야 하냐며, 너네가 세탁해서 우리 집으로 보내라고 컴플레인을 시작한 것이다.
게이트로 갔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승무원이 문제의 그 승객들(남자 하나 여자 하나)을 데리고 왔다. 남자는 키도 덩치도 크고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였고 여자는 여동생이라고 했다.
"세탁비 만원 갖고 이걸 어떻게 보상할 겁니까?" 하고 남녀는 따졌다. "우리가 번거롭게 왜 세탁을 해야 돼요? 당신들이 해서 우리 집으로 보내야지."
세탁소에 옷 하나 보내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번거롭다고 하니 일단 알겠다고 하고 옷을 받아 들었다. 하필이면 흰색 니트였다. 상표를 보니 아뿔싸, 랄* 로* 이었다.
오렌지쥬스가 담긴 종이컵을 쏟는 바람에 승객의 소중한 랄* 로* 니트 옷에 얼룩이 지게 만든 승무원은 딱 봐도 어제오늘 입사한 막내 승무원이었다. 얼마나 기내에서 지랄했는지 승무원도 눈물이 글썽했다. 여자 승객은 니트 옷을 벗어서 내 손에 하녀한테 이거 빨아오라는 듯이 쥐어주었다. 그러더니 또 이랬다.
"오늘 이렇게 추운데 나 이거 벗어주고 추워서 어떻게 가라고."
아 그럼 입고 가시던가요. 내 옷이라도 입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랄* 로* 입으시는 분이 누추하게 내 옷 따위를 입으실 리는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이거 내일까지 빨아서 보내요."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내가 "내일 세탁 맡기면 모레 도착할 가능성이 높은데, 내일까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 남자는 자기 손가락을 내 미간을 향해 찌르듯이 들이대며 "내일까지 보내라고! 안 그러면 당신들 아주 가만 안 놔둘 줄 알아."라고 했다.
와 눈알 찔릴 뻔. 집에 얼마나 가난하면 입을 옷이 이거 말고는 없어서 당장 내일까지 갖다 놓으라고 할까. 랄* 로* 입는 사람도 집안 형편은 나의 생각하고 다를 수 있으니 일단 알겠다고 했다(아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남녀는 돌아갔다. 막내 승무원과 나는 흰 니트를 손에 쥐고 망연자실했다.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서 김포공항 주변에 있는 모든 세탁소에 전화를 다 걸었다. 지금 당장 가지러 오실 수 없냐, 어떻게든 세탁해서 내일 보내야 한다고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다들 대답은 하나였다.
"내일까지 배달은 안됩니다. 모레는 가능."
그나마도 픽업은 지금 당장 해준다는 곳을 하나 찾았다. 모레 갖다 주면 아까 그 남자가 내 눈알 도로 찌르러 올 것 같아서 일단 어떻게든 내일까지 오토바이 퀵배송이라도 보내달라고 빌고 사정했다. 세탁소 주인은 일단 픽업해서 본다고 했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니 아까 그 막내 승무원이 서 있었다. 승무원과 나는 혹시라도 귀하신 흰 니트에 쥬스 물이 들어버리면 큰일이니 물이라도 일단 뺍시다, 하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니트니까 따뜻한 물은 안된다)을 세면대에 받아놓고 둘이 같이 울면서 쥬스 물부터 뺐다. 그리고 세탁소 아저씨가 물 떨어지는 채로 가져가면 안 될 테니 그걸 또 눌러서 짰다. 그리고 깨끗한 비닐에 넣어서 세탁소 아저씨한테 넘겼다.
나도 나지만 승무원도 정말 불쌍했다. 아니 쥬스 주다 보면 흘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죽일 놈들 취급을 하고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이야 감정노동자들에게 험한 말 하지 말라는 홍보가 좀 된 편인데 그땐 그런 것도 없었다. 자기 기분이 나쁘면 항공사 직원이든 콜센터 직원이든 스벅 알바든 얼마든지 지랄지랄 할 수 있었다. 옷을 아예 찢어서 못 쓰게 만든 것도 아니고, 승무원이 쥬스 흘려놓고 나 몰라라 쌩깐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지랄을 해야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국은 옷은 다음날이 아니라 다다음날 배달되었다. 승객이 사는 곳이 세탁소랑 머니까, 오토바이 퀵배송 해서 집에 보내줬다. 다음날 옷이 안 왔다고 눈알 찌르러 올 줄 알았는데, 세탁소랑 통화해 보니 별 말 안 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나는 핸드폰 번호를 바꿔야만 했다. 왜였을까? 그 남자 승객이 내 명함을 받아갔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달라길래 줬는데, 다음날 그 남자가 전화해서 옷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재차 물었던 것이다.
내 번호 진짜 좋은 번호였는데 너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알에 대고 삿대질 하는거며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 내일까지 갖다놓으라고 협박하는 걸 보면 도라이거나 조폭이거나 둘 다일 테니 그런 사람의 손에 내 연락처가 있는 것은 불안했다. 전화번호 바꾸면 신규 번호 안내 서비스를 해주는데, 그것도 막았다.
그날 바꾼 전화번호를 2025년 현재까지 쓰고 있다. 그 일을 거울삼아, 그 이후로는 명함에 핸드폰번호를 쓰지 않았다. 5년 후 현장을 떠날 때까지 핸드폰 번호 없는 명함만 쭉 썼다.
만약에 그때 제주-김포 노선 오렌지 쥬스 흘려서 옷 맡기신 분 행여라도 브런치 글 보신다면...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싶다 톤).
제가 15년 동안 현장근무 해보면서 느낀 건데.
진상은 자기가 진상인 줄 모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