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밑도끝도 없는 말랑함이 싫다
생업에 치여 살다 퇴근했다.
늦은 저녁 먹고 그래도 내가 명색이 브런치 작가인데 글 하나는 올리고 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항상 그렇듯이 옛날 얘기나 좀 찌그리고 자야겠다.
20여 년 전,
나는 PC 통신(이름은 들어봤나 PC 통신, 두유노 접속?) 암튼 거기서
간질간질 말랑말랑한 인터넷 갬성 글귀를 보았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그냥 이쁜 말만 나열해 놨기 때문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현실 패러디해서 게시판에 올렸다.
며칠 후, 몇몇 사람들이 퍼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아 맘대로 하셈 푹푹 퍼가세요 하고 free 박아 두었다.
몇 년 후, PC 통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
나는 어딘가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 글을 발견했다.
마치 고려가요처럼 '작자 미상'으로 표기된 그 글을.
그리고 10년 후, 나는 직장에서 만난 내 친구에게 갑자기 생각나서 그 글 얘기를 했다.
그런데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자기도 그 글 봤다고 했다.
그거 쓴 게 언니였냐며 미친 듯이 웃었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해 보면 그 글이 아직도 돌아다닌다.
심지어 직장 버전 등으로 새로운 버전까지 만들어져서 원본 + 내꺼 + 새로운 버전 이 세 개 세트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설명이 길었다.
이제 나의 젊은 시절 삐뚤어진 갬성을 보여드리겠다.
누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옴은..
당신과 친해지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허둥댄다면..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을 따갑게 바라봄은..
당신에게 무언가 고백하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장난치고 농담함은..
당신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싫음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유 없이 "고맙다"라고 말을 자주 한다면..
당신을 사랑함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지난 시간을 들춘다면..
당신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당신의 옆모습을 지극히 바라봄은..
사랑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함입니다.
누가 당신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은..
당신을 보내야 함을 인정함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당신을 잊기 싫으나 잊어야 함을 감추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시를 적어줌은..
당신의 모든 것을 깊이 사랑함입니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옴은..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음입니다.
누가 나를 보고 허둥댄다면..
나에게 찔릴 만한 짓을 했음입니다.
누가 나를 따갑게 바라봄은..
나의 얼굴에 뭔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장난치고 농담함은..
내가 제일 만만해서입니다.
누가 나의 뒷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바라봄은..
내가 가는 걸 확인하고 뒷다마를 까려 함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유 없이 "고맙다"라고 말을 자주 한다면..
말로 때우고 끝내려 함입니다.
누가 나의 곁을 냉정하게 지나감은..
나한테 뭔가 불만이 있음입니다.
누가 나에게 지난 시간을 들춘다면..
나의 과거를 알고 희망을 얻으려 함입니다.
누가 나의 옆모습을 지극히 바라봄은..
나올 데 들어가고 들어갈 데 나온 옆모습이 하도 흉함입니다.
누가 나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은..
나의 이마에 환타라도 한 방울 묻어서일까요? -_-;;
누가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런 시를 적어줌은..
보고 정신 좀 차리라는 뜻입니다.
(작가 주)
'나의 이마에 환타라도 한 방울 묻어서일까요?'는
예전에 환타 광고 중 미녀가 이마에 환타 한 방울 묻은 남자 이마에 입맞추고 그 한 방울을 슈습! 하고 지나가는 광고가 있었다.
그거 생각나서 저렇게 쓴 건데, 막상 그 광고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저 문구는 아무도 이해 못 한 것 같다.
PC통신스러운 -_-;; 라는 이모티콘도 그대로 붙은 채 여기저기 퍼져 있어서 그대로 다시 퍼왔다.
혹시 어딘가의 유머 사이트나 퍼온 글 게시판에서 이 시(?)를 보신 분이 있다면,
그렇다, 내가 그 패러디의 원작자다.
패러디 원본 시(말랑 버전)의 원작자는 누군지 모른다.
양귀자 시라고 써붙여 놓은 블로그를 보긴 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생업에 치여 하루에 글 하나씩 올리거나 그렇게는 못하지만
그리고 잡담만 쓰고 가자니 여기는 블로그가 아니라 나름 정화 과정을 거쳐 '글', '작품'을 올리는 곳이라
적당한 잡담과 함께 나의 옛 작품을 올린다.
나중에 기회 되면 대학 때 과제한 거, 초딩때 쓴 독후감 같은 것도 올려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