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스런 스케일, 광활한 서사, 브라흐마님 만세
라마야나. '라마가 걸어간 길' 이라는,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힌두교의 2대 서사시이다.
분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나는 비룡소에서 어린이용으로 나온 라마야나를 읽었다. 이쪽도 400페이지가 넘는 걸 보면 오리지널의 분량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힌두교 쪽 얘기들은 경악스런 스케일(특히 숫자)로 공통적으로 '황당미'가 있는데, 이것도 처음부터 이 모양이다.
43억 2천만 년의 한 '겁'이 지나고 새로운 43억 2천만년의 주기가 시작되고…
시작하자마자 바늘방석에 앉아 3천 년, 두 손을 모으고 한 발로 서서 삼천 년, 아무것도 안 먹고 삼천 년의 고행을 하는 '마누' 성자 이야기가 나온다. 오오!!! 수행한 기간만 다 합해도 구천 년이다. 진짜 쩌...아니 멋지다. 이런 힌두식 밑도 끝도 없는 광활한 스케일 정말 마음에 든다.
비옥한 땅에 풍부한 강이 흐르고 과일과 곡식은 주렁주렁. 사람도 동물도 모두 해피한 아름다운 나라 코살라.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의 왕에게 어찌 된 일인지 자식이 없다.
근심하던 왕 다샤라타는 이웃나라에 머물고 있던 대성자 '슈링가'를 초빙한다.
원래는 히말라야 산속에서 수행하는 순결한 성자였던 슈링가. 당시 가뭄으로 지독한 고생을 하고 있던 앙가 왕국은 비를 내리기 위해 성자를 모셔오도록 꽃으로 치장한 절세미녀를 한 배 가득히 싸다 보내서 성자 앞에서 춤을 추게 한다. 순결한 대성자인 슈링가는 '너무나도 순순히 전혀 거부 안하고' 춤추는 언니들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 앙가 왕국으로 온다.
아, 성자라면서요!
이렇게 이웃나라 앙가 왕국에서 잘 지내고 있던 슈링가(심지어 공주하고 결혼도 한다!)를 특별 초빙한 다샤라타 왕은 성인의 말대로 제사를 지내고 왕비 세 명에게 신성한 우유를 먹여(뭘 먹였을까. 난임 부부들에게 소개시켜야만 하는 물질임에 틀림없다) 순식간에 아들 넷을 얻었다(이정도면 네명 다 왕의 자식이 맞는지도 좀 의심해 봐야 한다).
그리하여 태어난 왕자들 중 가장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용모도 뛰어나고 용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다르마'에 충실한 도덕적이고 효성스럽고 etc... 라마 왕자.
그는 사실 비슈누 신의 화신이었다. 비슈누 신은 공무로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세상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종종 태어나곤 했다.
어나더 대성자 '비슈바미트라'는 자기 수도원 근처에 출몰하는 악귀들을 처치할 충분한 힘이 있었으나 업보가 쌓이는 게 싫어서 다샤라타 왕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라마와 락슈마나를 뭔가 수행을 쌓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데리고 나와 악귀들을 마구 죽이며 여행을 한다(자기 말고 딴 사람은 업보가 쌓여도 되나요?).
그러던 어느 날 비데하 왕국을 방문한 라마 왕자 일행은 그 나라 왕이 밭고랑에서 줏어다 기른 양녀인 시타 공주(비슈누 신의 부인인 락슈미 여신의 화신)를 만나게 된다. ‘머리는 비단결 같고 눈은 보석처럼 영롱하며 입술은 촉촉한 앵두 같고 허리는 달밤의 박꽃처럼 희고 나긋한'(정말 예쁜가 보다) 시타 공주와 라마 왕자는 제길 환생해서도 또 같은 인간... 아니라 신이랑 결혼하게 됐네 첫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숲 속의 오두막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라마와 시타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초거대공포괴수, 악귀의 왕 '라바나'의 여동생 '슈르파나카'가 숲 속에서 라마 왕자의 용맹한 모습을 발견하고 첫눈에 반해서 찾아온다.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고 종족도 다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는 라마 왕자에게 슈르파나카는 "라마! 부인은 둘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유혹한다(오오... 걸크러시라고 하기엔 자존감이 좀 부족해 보인다만 암튼 쿨하다).
라마는 대답 대신 '내 마누라가 더 이뻐서 안 되겠다'라는 뜻으로 시타 공주를 데리고 와서 보여준다. 시타의 미모에 기가 죽어 물러난 슈르파나카는 울면서 오빠 라바나에게 달려간다.
오빠인 라바나는 악귀인 락샤사의 무리를 이끄는 왕이다. 열 개의 머리와 스무 개의 팔을 가지고 구릿빛의 입술에 스무 개의 붉은 눈을 가졌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모든 개들이 꼬리를 잡기 위해 왼쪽으로 돌면서 크게 짖었다는(??? 뭐냐고요) 전설이 있다.
라바나는 신들이나 락샤사에게도 죽지 않는 힘을 신들의 왕 브라흐마로부터 받았다. 라바나는 천 년에 한 번씩 머리 하나씩을 잘라 불 속에 던져 넣는 고행을 했는데(악귀라면서요!) 만 년째가 되어 마지막 머리를 자르려고 할 때 브라흐마신이 내려와 라바나를 말리며 소원을 들어준다. 그런데 라바나가 하필이면 그런 소원을 말했던 것이다. 착한 신 브라흐마는 라바나의 불에 탄 머리도 돌려주어 더 나은 모습으로 살게 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내려와 주십시오, 브라흐마 님. 전 아무것도 돌려주실 건 없고 이 살들을 좀 가져가 주십시오. 기미와 잔주름도요.
그런데 이 라바나...'열 개의 머리와 스무 개의 팔을 가진' 라바나가 실은 '무예뿐 아니라 늠름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으며 음악과 시를 즐기는 풍류가' 이기도 한데 어찌나 뛰어난지 주변의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 미인들이 항상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열갠데도 여자들이 쫓아다닐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다니 뭐... 썩 괜찮게 생겼나 보다...
그래서 라바나는 시타 공주를 데리고만 오면 자기한테 바로 반할 거라고 생각하고 시타를 납치하러 간다. 그런데 라바나는 소싯적 좀 놀던 시절에 압사라(신들의 무희, 요정)들 중 하나를 겁탈했다가 '허락 없이 여자의 몸에 손대면 즉시 머리가 터져 죽는다'는 접근금지명령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시타 공주를 납치할 때 '발아래 구덩이를 파고 시타의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흙째 파올려서 데리고 갔다(전자발찌 대신에 이런 것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타 공주를 되찾고(신들로서는 신들도 락샤사들도 라바나를 죽일 수 없으니 예외 조항인 인간 라마의 손으로 해치운다는 잔머리이기도 하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라마 왕자가 모험을 하는 것이 바로 라마야나인 것이다...
게다가 거기 나오는 다른 주인공들도 어찌나 다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너그러워서 원숭이가 이쁘다고 아내로 삼고... 원숭이가 이뻐 봐야 뭐 얼마나 이쁘다고 마누라로 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힌두 신화란 그런 것이다(급히 마무리).
진짜 재밌으니 나처럼 어린이용으로라도 꼭 읽어 보시길.
(어린이용 결말이 낫습니다. 오리지널은 시타 공주 팔자가 너무 쎄서 빡침 - 인도 여성 인권이 왜 그따위인지 이해가 가는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