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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그라프톤의 전설] 다 루안, 다 모르트

월요일, 화요일,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by 마봉 드 포레

민화집인데 재미가 없을 수 있다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옛이야기(=켈트 옛이야기, 현대지성사)]는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거두절미 까놓고 말하자면 재미 없었다ㅜㅜ. 이해가 안 갔다. 재미 없을 수가 없는 얘기들인데 왜 이렇게 페이지가 안 넘어가는지, 왜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도 안 보이는지.


더럽게 재미없던 책도 2-3년 후에 다시 읽어보면 보석과 같은 글이 숨어있어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도 많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래도 책이 두꺼워서 "아아 이렇게 두꺼운 책에 민화들이 가득 차있다니 너무 좋아...♡" 하며 한 상 가득 차려진 잔치상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산 책인데, 이러면 너무 실망이지 않아?


그러다가 어느날, 침대에 퍼져 누워서 책의 끝부분을 읽다가 빠직#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의 근본 없는 방랑벽에 큰 영향을 끼친 창비판 [에이레 민화집]에 있던 '녹그라프톤의 전설 The Legend of Knockgrafton' 이 이 두꺼운 책에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내용은 울나라 혹부리 할아버지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마음씨 착하지만 등에 큰 혹이 달린 루스모어(러스모어/Lusmore)가 밤중에 노숙(?)하다 풍류를 즐기는 요정들을 만나 노래 한곡 불러주고 혹 떼고 잘생긴 젊은이가 된다는 얘기다.


다 루안, 다 모르트, 다 루안, 다 모르트... 대체 뭐라는 거요


노숙하던 루스모어는 녹그라프톤의 성벽 아래서 요정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다 루안, 다 모르트, 다 루안, 다 모르트, 다 루안, 다 모르트 ...(중략)...그래서 다 루안, 다 모르트가 세 번 불리고 쉬는 사이를 이용해 곡조에 집중하여 앙구스 다 카딘이라는 노랫말을 부른 다음 해자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들과 함께 계속 노래하며 다 루안 다 모르트 가락을 끝내고, 쉬는 사이에는 다시 앙구스 다 카딘으로 채웠습니다.(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옛이야기)
월요일, 화요일, 월요일, 화요일, 월요일, 화요일 ...(중략)...그래서 "월요일, 화요일"이 세 번 되풀이되고 잠시 쉴 때에 그는 자기가 곡조를 붙여 "그리고 수요일" 이라고 이어서 노래를 불렀어요. 성벽 안의 사람들과 함께 "월요일, 화요일" 을 노래부르고 곡이 끝나면 다시 혼자 "그리고 수요일" 이라고 잇는 것이었어요. (에이레 민화집)


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는 첫번째 번역, 친절하게 다 루안, 다 모르트의 악보까지 그려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눈에 거슬리는지, 도대체 원문에 뭐라고 써박아 놨길래 이렇게 해놨을까 하고 책장에 있지만 원서라서 절대 안 읽어보는 책 [Fairy Tales of Ireland] 를 찾아보았다.

Da Luan, Da Mort, Da Luan, Da Mort, Da Luan, Da Mort ...(중략)...so availing himself of the pause when the Da Luan, Da Mort, had been sung three times, he took up the tune and raised it with the words augus Da Cadine(and Wednesday), and then went on singing with the voices inside of the moat, Da Luan, Da Mort, finishing the melody, when he pause again came, with augus Da Cadine.


그리고 혹시 뭐 더 없나 하고 웹싸이트를 찾아보니 친절하게도 원문을 몽땅 다 쳐서 갖다붙인

shee-eire.com 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거기엔 이렇게 나와 있었다.

Da Luan, Da Mort, Da Luan, Da Mort, Da Luan, Da Mort ...(역시 중략)...so availing himself of the pause when the Da Luan, Da Mort, had been sung three times, he took up the tune and raised it with the words augus Da Cadine, and then went on singing with the voices inside of the moat, Da Luan, Da Mort, finishing the melody, when he pause again came, with a'ugus Da Cadine. [correctly written, Dia Luain, Dia Mairt, agus Dia Ceadaoine, i.e.. e. Monday, Tuesday, and Wednesday.]


그래, 어떻게 된건지 대충 감 잡았다. 그전에도 이런 스타일의 번역에 대해서 글을 올린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영어도 아니고 불어, 독어도 아니고 일어나 중국어도 아닌, 전세계에 그 언어의 사용자가 얼마 되지도 않으며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극도로 생소하고 그 원 뜻을 추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게일 어 따위를 각주하나 안 달아놓고 그냥 내보내는 것은 너무... 불친절하지 않아?


번역하신 양반이 왜 이렇게 해놨을까, 하고 책의 앞뒤를 뒤져 봤더니 과연 이런 말이 씌여 있었다.

저자는 켈트적인 특색을 전달하기 위해 가끔 게일어를 번역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원문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서 번역 과정에서는 이를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웠다. 물론 원어를 표기하고 각주를 달아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이야기의 원활한 호흡을 끊어놓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아 그랬군. 이 사람은 제이콥스씨라는 영국양반이 낸 켈트 이야기 책을 통째로 번역한 것이고, 그 제이콥스란 양반이 그 책에 설명 하나 안 달아놓고 그냥 게일어 그대로 써놓았던지라 그걸 그 상태 그대로 번역했다, 번역하면서 설명 달 수도 있었는데 호흡이 끊어질까봐 안 그랬다, 하고 설명하고 있는 거로군.


구구절절 왜 각주 안달았나 설명하는 번역가는 아무말도 안 써놓는 번역가보다 훨씬 성실하고 친절해서 좋다. 그치만 한국어와 게일어의 지구-목성간쯤 되는 거리를 생각하면, 이왕이면 그냥 각주 달지 싶었다. 아니면 거꾸로 '월요일, 화요일, 월요일, 화요일Da Luan, Da Mort, Da Luan, Da Mort...' 라고 붙여놨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일랜드는 게일어를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우므로 Da Luan, Da Mort가 변형된 표기이긴 해도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마치 ‘워려일, 하여일, 워려일, 하여일, 그리고 또 스여일’ 이라고 써놔도 한국사람이라면 다 이해하듯. 하지만 잉글랜드만 가도 저거 무슨 말인지 모를걸? 하물며 한국사람한테 월요일, 화요일과 다 루안, 다 모르트는 너무 이해의 갭이 큰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즐겁고 발랄한 도깨비 이야기에 '~이용해' '~집중하여' '~끝내고' '~채웠습니다' 같은 저 딱딱한 문체는 정말 마음에 안든다. 전공서적도 아니고 어른이 읽든 아이가 읽든 옛날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어쩜 저렇게 딱딱하게 써놨을까? 어린이 독자 대상인 창비처럼 '~하는 것이었어요' 라고까지 쓸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더 상큼하게 할수도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것은 그냥 지나가는 한 독자의 집요한 불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하는 사람은 자기 번역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꼴저꼴 다 보기 싫으면 그냥 원서 읽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래도 '잘 된 번역서' 를 원서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번역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중).

ChatGPT Image 2025년 10월 3일 오후 11_41_43.png 아일랜드의 무너진 성터에 요정 둘이 앉아있다. 두 요정은 귀가 뾰족하고 날개가 달려 있고, 한 요정은 피리를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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