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왕도둑 호첸플로츠]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한 도둑

나도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를 갖고 싶어!

by 마봉 드 포레
[사진출처 YES24] 오토프리트 프로이슬러 글, 김경연 역, 비룡소 출판

왕도둑 호첸플로츠 - 오토프리트 프라이슬러 님의 작품

[왕도둑 호첸플로츠]는 오토프리트 프로이슬러라는 훌륭하신 작가가 1962년에 쓴 책으로써, 속편인 [호첸플로츠 다시 나타나다!], [호첸플로츠 또 다시 나타나다!!] 까지 총 3권으로 되어 있다.


내 나이 사람들 집에 아직도 한두 권쯤 안 버리고 남아있을 [에이스 시리즈]에 [크라바트]라는 책이 있다. 난 이 책을 중3때 읽었는데 그때 이걸 읽고 어찌나 가슴 깊이 감동을 받았는지 학업을 때려치고(중학생이었다) 당시 동서독 통일 직전이었으므로(연식 나오지만 넘어가 주세요) 가볼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겼던 작센 지방에 대한 환상도 그때 키웠다(근데 아직도 못 갔다).


얘기가 딴데로 샜는데, 아무튼 그 책의 작가가 프라이슬러였다. 권말 작가 소개 페이지에서 프로이슬러가 [호첸플로츠] 시리즈도 썼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읽어봐야지! 했다가 진짜로 발견해서 막상 읽어보니...


재...재밌어! 재밌어서 미칠 것 같아!!!


크라바트가 조금더 조숙한 판타지에 가깝다면 이쪽은 100% 어린이용 동화책이다. 엄청 귀여운(?) 얘기이고 너무 산뜻한데다 글자 하나 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호첸플로츠의 얘기도 좀 들어 보자

왕도둑 호첸플로츠로 말할 것 같으면 매일같이 신문에 날 정도로 끔찍한 악당으로 아주 못된 도둑이다. 왕도둑 호첸플로츠는 카스페를네 할머니의 소중한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흘러 나오는 커피콩 가는 기계' 를 강제로 빼앗아간다.


무릇 대도라 함은 은행을 털거나 부잣집 보석이나 금괴를 털어야 하건만 꼴랑 커피 기계를 훔치는 걸 보니 명성에 비해 의외로 훔친 것이 없으며 실제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생계형 도둑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신문도 안 보셨소, 할머니? 잘 생각해 보시지!"


저 자부심! 자신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도에게는 아주 모욕적이다.


"당장 그 커피 기계 이리 내놔!"
"하지만 이건 당신 게 아니잖소!"


도둑에게 '그건 당신 게 아니잖아요!' 라고 하는, 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렇게 놀랍게 느껴질 수가! 문제는 현대 우리 사회의 도둑들은 뭐라 말을 해줄 기회도 없이 물건을 가지고 가버린다는 것이다.


호첸플로츠의 대답 역시 아주 진실하고 명료하다.


"나도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를 갖고 싶어. 어서 이리 내놔!"


나도 갖고 싶으니까 내놓으라는 이 또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대답! 진실한 사람들만이 등장하는, 첫 페이지부터 이토록 사람을 감동시키다니, 역시 프로이슬러 님이다.


이렇게 할머니로부터 커피 가는 기계를 강탈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호첸플로츠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한 줄도 버릴 것이 없는 너무나 훌륭한 이야기로 시리즈만 한 30권 줄창 나와도 다 사고 싶은데 이 양반 겨우 3권까지밖에 안 썼다. 아아 아쉽다 아쉬워.


참고로 삽화는 요제프 트립이란 사람이 그렸다. 그림도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이쁘며 딱 글의 분위기로 그렸기 때문에 너무너무 만족스럽다. 이런 보석같은 책이 애들 보는 책 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그 가치를 못 알아차리고 넘어가는 것은 범죄다.


결말 스포!

이 아름다운,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커피 가는 기계는 나중에 마법의 힘으로 '노래가 이중창으로 흘러나오는 커피 가는 기계' 가 된다. 마법은 이런 데 쓰는 거다. 단성 노래가 이중창이 되도록 하는 마법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2일 오후 02_11_41.png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커피 가는 기계가 빨간 체크무늬 테이블보 위에 놓여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로미오와 줄리엣] 편지 배달 사고가 초래한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