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차라리 줄리엣 머리를 밀지 그러셨어요
셰익스피어가 빵집 이름인줄 아는 사람조차도 로미오와 줄리엣 내용은 안다. 그러니 뮤지컬이 불어로 나와도 얘네들이 지금 무슨 얘기 중인지는 대충 때려맞출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두가 다 아는 바대로 원수 집안의 아들과 딸이 파티에서 만나 눈이 맞아 둘이서 “사랑해요 죽겠어요” 하고 북치고 장구치다가 자살해 버리는 이야기이다. 뮤지컬 내용도 이와 같다. 단 뮤지컬에는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중요한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모두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하는 동안 목을 길게 빼고 얇은 흰옷 한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버티며 노래나 대사 한마디 없이 춤만 추면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여자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죽음언니(la Mort)...
엘리자베트의 죽음(Der Tod)과는 또 다른 존재다. 이 언니는 도대체가... 등장이 너무 잦다. 30%만 덜 나와 줬어도 훌륭한 양념이 되었을 텐데 스폰서네 집 딸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때나 막 나와서 계속 저 기저귀같은거만 흔들면서 배후 조종자 짓을 한다. 가장 중요한 진상짓은 역시 줄리엣이 가짜로 죽은 거라는 얘길 담은 편지의 배달사고를 저 여편네가 낸다는 것인데, 그때만 좀 많이 나와주고 나머지 다른 장면에서는 좀더 비켜줬더라면 참 좋았을뻔 했다. 어떤 때는 이게 뮤지컬이 아니라 '죽음 언니의 무용발표회'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줄리엣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스아실 죽은거 아님! 그니까 니가 무덤 와서 애 깨워갖고 데리구 가서 살것! 이라는 편지만 제때 배달되었어도 사랑에 미친 중2병 소년소녀가 자살까진 안 했을 것이다. 통신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중간에 우편물이 유실될 정도로 통신이 불안정한 세계라면 적어도 만투아 가있는 로미오한테 계획을 알리고 동의 및 컨펌이라도 받은 후에 줄리엣이 약을 먹었어야 했다. 결혼식이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서로 연락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줄리엣네 아부지가 얘 지금당장 롸잇나우 결혼시키느라 급하긴 했다. 이번주에 당장! 이랬단 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딸이 로미오랑 사귀는 것도 몰랐고 처조카 티볼트가 죽었다고 해서 당장 집안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파리스 백작한테 낼모레 바로 보낸다고 난리다. 명색이 백작이랑 결혼인데 결혼 준비할 시간도 안 준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딸이 말을 안들어서 빨리 시집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차라리 줄리엣 머리를 밀지...
한마디로 재수가 없을라니 평소에 안 나던 편지 배달사고도 하필이면 지금 나고, 로미오가 줄리엣 가짜 시체 옆에서 묵념이라도 좀 하고 나서 독약 먹었으면 타이밍 잘 맞춰서 줄리엣 깨어났을 수도 있는데, 아 로미오 이놈이 또 성질이 급해. 둘다 성질도 급하고 집에서 못만나게 하니까 더 불타올라 욱해갖고 냅다 저지르고 하는걸로 보아 얘네 제대로 결혼 했어도 오래 못 살고 이혼했다에 치킨 건다.
그에 비하면 파리스 백작은 어찌나 사람이 괜찮은지 모른다. 젊고, 백작이고, 지고지순하게 줄리엣만 생각해, 죽은 줄리엣 추모하러 무덤 찾아왔다가 애꿎게 로미오한테 개죽음만 당한다. 그렇게 순정을 바쳤는데 줄리엣 곁에 묻히지도 못한다. 로미오 진짜 못됐다. 솔직이 파리스 백작이 무슨 죄냐. 너네 둘이 사귀는 줄 알았으면 그 사람 줄리엣이랑 결혼하자고 하지도 않았고 무덤에 가지도 않았어, 이 못된 애새끼들아.
사실 옛날에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를 읽을때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의 집안 싸움으로 죽다니, 이런 비극이! 우리 이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라는 결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든 지금 부패한 머리와 정신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너네집 자식이 멀쩡한 우리애 꼬셔서 동반자살했다. 우리애 살려내라, 고소해 버리겠어!' 가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비극적인 가운데 로망이 넘쳐나는 명작이란 절대 탄생하지 못했겠지. 이 극의 부제는 'de la haine, a l'amour 증오에서 사랑까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