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상아의 문으로>,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있을 법한 모든 것> 등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은 딸이 어버이날과 아버지 생일을 함께 기념하며 선물해준 책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책을 고른다는 마음, 그 마음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따뜻한 선물이 이라고 생각됩니다.
책을 건네며 딸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라며 꼭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세대가 다른 딸의 감성과 시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제목부터 낯설고 묘한 매력을 풍기는 이 책은, 그렇게 자연스레 나의 하루에 들어왔습니다.
제목 '파과(破果)'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무엇이 부서지고 또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 이 이야기 안에서 저는 딸이 건넨 작은 마음을 오래 곱씹으 책의 첫장을 넘깁니다.
* 영화의 원작인 만큼 책의 줄거리에 다소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마부자의 도서관, 그리고 소소한 일상이 담긴 .. : 네이버블로그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한때 ‘손톱’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며 40여 년 가까이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누군가를 몰래 제거하는 일, 그것은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조각은 그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해왔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조각이 처음부터 그런 삶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킬러가 된 배경에는 류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각에게 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일시적으로나마 알려주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킬러의 곁은 늘 공허하기 마련이라, 류 또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어느 날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조각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삶의 중심은 ‘지키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무엇도 가까이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그렇게 그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조각에게 무용이라는 늙은 개가 찾아옵니다. 버려졌고, 작지도 귀엽지도 않아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을 그 개를 조각은 충동적으로 집에 데려왔습니다.
무용은 조용히 그녀 곁에 있었고, 조각은 매일 아침 그 개에게 “다녀올게”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인사는 아주 오랜만에 조각의 삶에 다시 생긴 작은 따뜻함이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느낌.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실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그녀의 일상에 들어옵니다. 치료를 맡게 된 젊은 의사, 강박사입니다. 조각은 처음으로 자신과는 너무 다른 이에게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고,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마음이었지만 조각은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조각의 삶에는 투우라는 젊은 킬러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남자는 일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종종 조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조각은 그의 행동을 경계하면서도 점점 더 그의 의도를 궁금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됩니다. 투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킬러가 바로 조각임을 알고 있었고, 그 복수를 위해 방역업자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조각이었습니다.
이후 투우는 강박사의 딸을 납치하며 조각에게 마지막 칼날을 겨눕니다. 조각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킬러로 살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선택한 감정. 그것은 생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유일하고도 가장 강한 감정이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조각은 냉장고 속에서 썩은 복숭아를 치우며 눈물을 흘립니다. 부서지고 상한 복숭아는 마치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닮아 있었습니다.
제때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고, 가장 좋은 시절을 지나 시큼하게 상해버린 삶.
그럼에도 조각은 그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합니다.
구병모작가의 <파과>는 청부살인이라는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삶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존재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은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히 뜨거웠습니다.
조각이라는 인물은 살인을 다루면서도 온기를 지키고자 했고 결국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인연을 위해 생애 마지막 ‘방역 작업’을 수행합니다.
여기서 잠깐! 구병모작가의 <파과>는 2025년 4월 30일 영화로 개봉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개봉중인 영화로 자세히 설명드릴수는 없지만 영화와 관련된 내용을 공유드립니다.
영화 <파과>는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2025년 4월 30일 개봉하였습니다 .
민규동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김무열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하여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지킬 게 생긴 킬러 VS 잃을 게 없는 킬러 40여 년간 감정 없이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방역해온 60대 킬러 ‘조각’(이혜영).
‘대모님’이라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지만 오랜 시간 몸담은 회사 ‘신성방역’에서도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한편, 평생 ‘조각’을 쫓은 젊고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는 ‘신성방역’의 새로운 일원이 되고 ‘조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스승 ‘류’(김무열)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던 ‘조각’은 예기치 않게 상처를 입은 그날 밤, 자신을 치료해 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의 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투우’는 그런 낯선 ‘조각’의 모습에 분노가 폭발하는데... 삶의 끝자락에서, 가장 강렬한 대결이 시작된다!
<자료 제공: 네이버 영화>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돌아오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당연히 돌아올 것을 유난스럽게
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140 page
딸에게 책을 선물 받고 <파과>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부서진 과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상처 입고 무너진 사과 한 알, 혹은 쪼개진 복숭아 같은 이미지.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나니 이 단어 안에 담긴 또 다른 뜻,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의미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마치 모든 생은 사라지기 전에야 비로소 한 번 빛난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소설은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시선으로 펼쳐집니다.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을 통해 킬러가 되었고, 이제는 그 사랑도, 날렵했던 손놀림도 모두 희미해진 시점에서, 그녀는 여전히 ‘방역’이라 불리는 일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킬러의 삶을 따라가는 전형적인 서사가 아닙니다. 누구를 죽였는가보다, 그 일을 해내고도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는 ‘살아 있음의 감정’에 더 집중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줄거리를 깊이 말하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최근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장면은 화면으로 마주할 때 훨씬 생생할 테고, 또 어떤 장면은 책에서의 여백과 감정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각 케릭터들의 그림자를 조심스레 언급하는 정도로만 멈추고자 합니다.
이 인물들이 조각이라는 한 인간의 궤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는 직접 읽으시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다가온 건 구병모 작가의 문장이었습니다. 책 속의 많은 문장들이 사실은 감정의 고백이자 생의 자락을 천천히 꿰매는 바느질처럼 느껴졌습니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갈색 덩어리(125page).” 그녀가 냉장고 속에서 꺼낸 그 복숭아 하나가 조각이라는 인물의 전 생애를 보여줍니다.
썩어버린 과일 하나가 인생 전체를 은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문장이라는 도구가 가진 가장 정교한 힘이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파과>를 읽는다는 건, 어떤 폭력의 이야기보다 어떤 ‘늙음의 고요함’을 바라보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잔혹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빠르게 사라지지만,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가 남긴 발자국은 무겁고 느립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 느린 속도의 가치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살아 있는 날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중요한 날들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지키지 않으려고 살아온 삶’에서, 무엇인가를 지키고 싶어지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그것이 한 마리 늙은 개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파과>는 바로 그 감정, 부서지기 전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마음의 결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책장을 덮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언젠가 복숭아처럼 부서질 존재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토록 뜨겁게 지금이라는 시간을 지키려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