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바람을 맞는 내 감정이
달라진 것 뿐이었다.

by 마부자

입원 35일차, 항암 5회, 방사선 치료 23회.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병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피부에 살짝 스미는 아침.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성가시게 그러나 어쩐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며칠간 이어진 불면의 여파로 몸은 한껏 무거웠고 어제는 그 피로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깊은 목마름의 갈증조차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깊게 잠든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잠 사이사이, 나는 여러 번 꿈을 꾸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지난밤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꿈이 이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꿈의 내용은 이미 희미하게 흩어져 버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아마 좋은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어쩌면 내 몸과 마음이 오래 묵혀둔 피로와 감정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그 꿈조차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치 치료 과정에서 겪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받아들이듯이.


어쩌면 이렇게 무심히 흘러가는 하루들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료도 링거도 없는 일요일 하루는 온전히 쉬는 날이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방사선 치료와 한 번의 항암주사가 내 몸에 남기는 흔적은 생각보다 깊었다. 치료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무게가 점점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치료를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주말이라는 숨 쉴 틈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더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잠시 잦아드는 이 짧은 휴식 덕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은 가벼운 몸으로 다음 주를 준비할 힘을 얻는다.


치료와 치료 사이의 이 숨 고르기가 어쩌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부터 내린다는 비 소식에, 점심을 간단히 마친 뒤 병원 밖으로 나섰다. 뜨겁지 않은 햇살 아래, 울창한 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오늘따라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어제 머물렀던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려 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희망 쪽으로 조금 더 숨 쉴 수 있는 쪽으로.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은 있다. 나만 아픈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저마다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아픔은 크고 작음을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씩 배워간다. 그저 칼날이 살갗에 닿는 순간 그 크기와 상관없이 아픈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인생이라는 긴 길 위에서 내가 마주한 수많은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나만 아픈 게 아니다. 단지 아픔의 모양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묘하게 나를 위로했다.


같은 바람이라도 그 안에 담긴 온도에 따라, 그리고 어디에서 그 바람을 맞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의 산바람이 그랬다.


어제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절망을 느꼈지만 오늘의 나는 같은 바람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결국 바람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바람을 맞는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바람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아니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응원 같았다. 마치 “조금만 더 버텨보라”는 자연의 목소리처럼.


바람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이어가다 반대편 길로 내려섰다. 길을 건너 번화가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자, 줄지어 늘어선 음식점들의 간판과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평소 음식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이 장면이 그저 지나치기 힘든 고문 같았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맛의 기억들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되살아나 마치 뇌를 잠식하듯 퍼져갔다. 그러나 정작 내 입속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현실.


먹방 프로그램 속 패널들이 "맛을 아니까 못 먹으면 더 힘들다"던 말이 오늘만큼은 유난히 가슴 깊이 와닿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그 음식점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미각이 돌아오면, 이곳에 다시 와서 식당 하나하나를 전부 섭렵해 보리라.


그날의 나를 상상하며, 나는 다시 병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갈증과 함께 아주 작은 희망이 오늘도 내 안에서 조금 더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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