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34일차, 항암 5회, 방사선 치료 23회.
지난 밤은 유난히 길었다.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는 동안, 목마름은 사막의 바람처럼 더 거칠게 나를 스쳤고, 구내염의 통증은 한층 더 깊어졌다.
죽과 국으로 간신히 식사를 이어가지만, 그마저도 단맛과 신맛이 쓴맛으로 변해버리는 입 안에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몸무게를 재니 64kg. 입원 전보다 7kg이 줄었다. 보통 10~15kg까지 빠진다고 하니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면 낯선 모습이 나를 바라본다. 예전의 단단한 허벅지와 종아리는 흔적만 남았고 빈 자리는 어쩐지 허전하다.
오전에는 링거를 맞고 잠깐 병원 밖으로 나갔다. 외출이라 부르기 민망한 짧은 걸음이었지만 건물 앞 산책로에 들어서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폭염 이라는데 울창한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뜻밖에 시원했다. 어지럼증 탓에 오래 걷지는 못하고 초입의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지난 시간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되감기 되었다.
병을 얻고 부터 원망을 삼키는 연습을 해왔다. 절망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런데 오늘, 이 낯선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런 마음이 풀려나듯 밀려왔다.
'도대체 왜 나인가?'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혹시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 아내와 장난처럼 얘기했던 것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었단 말인가?
동생의 사고,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부모의 싸움, 아내의 뇌출혈, 그리고 내 몸속의 암까지…
인생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겁이 났다. 이보다 더한 일이 닥치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이 이보다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 같은 것이 밀려왔다.
52년을 살며 나는 내 마음속에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오늘도 안다. 그 질문들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다만, 이렇게 묻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답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원망인지 회한인지 모를 마음을 한 움큼 가슴속에 남겨둔 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견디며 버티는 것만이 용기는 아닐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흔들리는 나를 바라보고 약한 내 모습까지도 조용히 끌어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문득 깨달았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숨을 쉬고, 이렇게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의 바람 한 줄기는 잠시지만 내 어깨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괜찮아, 너는 잘 하고 있어.”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하루를 건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