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지막 치료가 끝났다는 가벼움은 곧 무거운 통증으로 덮였다. 구토와 극심한 무기력은 내 일상의 작은 조각들을 하나씩 빼앗아 갔다.
내가 누리던 사소한 평범함.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집중하던 습관. 아침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걷던 여유. 그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찾아온 감정은 분명한 상실이었다.
상실
상실은 단순히 무언가를 잃는 일이 아니다. 상실은 나라는 존재의 일부가 무너져내리는 경험이다.
더 이상 예전처럼 웃을 수 없고,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으며, 예전처럼 나를 바라볼 수 없는 순간. 그것은 눈앞의 물건을 잃어버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결핍이다.
상실은 삶을 구성하던 기둥이 빠져나가는 경험이다. 나는 그 위태로운 텅 빈 자리를 매일 마주해야 했다.
그렇다고 상실이 곧 절망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실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바라보게도 한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면서도 나는 새롭게 채워야 할 것을 묻게 된다.
상실은 무너뜨리는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나는 여전히 무엇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나에게 상실은 항암이 끝나고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병이 앗아간 것은 단순한 체력이나 일상의 편안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익숙함과 나의 평온이었다. 어제까지 당연하다고 믿었던 작은 습관들. 물 한 잔을 마실 때의 아무렇지 않음.
거울 앞에서 웃을 수 있던 나의 얼굴. 잠들기 전 창문 너머로 스며들던 바람조차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사소한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순간,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를 함께 잃어버린 듯했다.
그러나 그 상실 속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더 선명해졌다. 잃은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이 또렷이 드러났다.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여전히 내 안에서 꺼지지 않은 작은 의지. 상실은 잔혹했지만 동시에 무심히 흩어져 있던 삶의 본질을 한곳에 모아주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무엇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지를 알게 되었다.
상실은 나를 무너뜨렸지만 그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것.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
나는 오늘 ‘상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상실은 단순히 빼앗김이 아니라, 남겨진 것을 더 간절히 붙잡게 만드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