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독서를 마친 후, 창밖에서 밀려든 뜨거운 초가을 햇살과 방 안을 채우는 무거운 열기를 느끼며 자전거 대신 서재에서 가벼운 웨이트를 시작했다.
퇴원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첫걸음은 아직 어색했고,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몸은 금세 한계를 알려왔다.
운동을 평소의 1/3 수준으로 줄였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운동을 마쳤다. 작아 보이더라도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운동을 마친 후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당분간은 새로운 책보다는 이미 읽었던 책 중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던 문장을 되새기기로 했다.
책장 사이에 오래 묻혀 있던 글귀가 지금의 내 마음과 다시 만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깨달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 선택한 책은 존 소포릭의 <부자의 언어>였다. 그 속에서 다시 눈에 들어온 문장은 이랬다.
“모두가 선망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비극은 있다.
하지만 비극은 그것이 핑계가 될 때 진정한 비극이 된다.”
존소포릭의 부자의 언어 중에서
나는 그 문장에서 ‘핑계’라는 단어에 발걸음을 멈췄다.
핑계.
핑계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학생일 때는 준비되지 않은 시험 앞에서 직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실수 앞에서 삶에서는 예고 없는 사건 앞에서 핑계는 늘 찾아온다.
핑계는 마치 방패처럼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또 다른 족쇄처럼 나를 묶는다. 겉으로는 합리화지만 속으로는 도망이다.
내 탓이 아니다라는 위안 속에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지만 그 순간의 안도는 결국 내 앞길을 가로막는 돌이 된다. 나는 병을 앓으며 수없이 많은 핑계와 마주했다.
핑계는 감정과도 닮아 있다. 감정이 순간의 파도라면 핑계는 그 파도를 피해 숨는 작은 바위다.
그러나 바위 뒤에 숨는다고 파도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물결이 밀려올 뿐이다. 결국 다시 맞서야 할 파도라면 숨는 대신 몸을 세우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다.
나는 ‘핑계’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실천을 떠올렸다. 핑계가 올라올 때마다 대안을 세워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하기 싫다는 핑계가 올라오면 오늘은 가볍게 스트레칭만 하겠다는 대안을 세운다. 글을 쓰기 힘들다는 핑계가 떠오르면 한 줄이라도 적겠다고 다짐한다.
핑계를 이유로 삼지 않고 대안으로 바꿀 때, 비로소 나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핑계는 사실 나약함의 증거이기보다 선택의 순간이다. 핑계를 붙잡으면 후퇴가 되고 대안을 붙잡으면 전진이 된다.
나의 병 역시 핑계가 될 수 있었다.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다.” 이 말은 너무도 쉽게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한다면 나는 병을 핑계로 삶을 멈춘 사람이 될 것이다.
반대로 병을 대안으로 삼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몸이 아프니 조금 더 천천히 가겠다.” 그렇게 말하면 삶은 멈추지 않는다.
핑계를 통해 나를 위로받으려 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위로가 길어지면 위안은 곧 자기포기였다.
진정한 위로는 핑계가 아니라 핑계를 넘어선 나의 작은 실천에 있었다. 병실에서도 퇴원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극은 핑계가 될 때 진정한 비극이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내게는 두려움이자 다짐이었다.
삶에는 늘 예상치 못한 비극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삼느냐 아니냐는 내 몫이다. 핑계는 나를 주저앉히지만 핑계를 넘어선 실천은 나를 다시 일으킨다.
오늘의 나는 비록 1/3만큼의 운동과 다시 펼친 오래된 책으로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핑계를 넘어선 작은 대안을 발견했다.
나는 오늘 ‘핑계’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핑계는 멈춤이지만 대안은 전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