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비가 온다고 예보하던 하늘은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가득한 그리고 강한 열기를 창문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이제는 물러날 시기가 되었것만 끝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폭염이 나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 했다.


이럴때 소나기라도 한바탕 쏟아져 주면 개운하련만 쉽게 흩어지지 않는 뭉게구름처럼 내 마음속 응어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카페인을 멀리해야 하는 지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지인이 선물한 국화차의 은은한 향으로 오후를 달래기로 했다. 따뜻한 차향이 번지는 서재에서 다시 펼쳐 든 존 소포릭의 책.


오래 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던 문장이 오늘 내게 다시 찾아왔다.


“고요 속에서는 내면의 지혜가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간절히 원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 언제나 답을 보내온다.”

존 소포릭의 부자의 언어 중에서


내면.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내면’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오래 두었다. 내면은 나의 안에 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나의 얼굴을 가진 존재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의 층 뒤에 숨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어쩌면 인간은 평생을 이 내면과의 싸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내면을 억누르고 어떤 이는 내면에 이끌려 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소리를 ‘어떻게 듣느냐’이다.


소포릭은 그 소리가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외부의 소음에 묻혀 버리기 쉬운 미세한 파동에 가깝다. 그래서 고요가 필요하다.


고요가 찾아오지 않으면 내면의 목소리는 잡음 속에서 사라지고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외면하게 된다. 내면은 들려주는 자가 아니라 들어주는 자를 필요로 한다.


내면의 소리는 지혜가 될 수도 있고 자멸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두려움에 지배된 사람은 그 소리를 불안과 의심으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가능성의 메시지로 듣는다.


어쩌면 나의 투병생활도 내면의 내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멈추지 않고 달리던 삶에 잠시 서서, 보이지 않던 균열과 무너짐을 바라보라는 목소리.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던 내면의 외침을 나는 병이라는 통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몸은 단단히 버텨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내면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속도를 늦추라. 네 자신을 돌아보라. 아직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외부의 소음, 바쁜 일상, 끝없는 욕심이 내 귀를 막고 있었다.


결국 내면은 더 강한 방식으로 나를 붙들었고 그것이 병이라는 현실로 나타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투병의 하루하루는 내 안에서 울려오는 두 가지 목소리의 대화다. 하나는 두려움과 절망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희망과 회복을 속삭인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중 어떤 목소리를 듣고 따라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병은 외부에서 온 적이 아니라, 내면에서 보낸 경고이자 요청이다.


나를 멈추게 하고, 다시 바라보게 하고, 새로운 길을 찾게 하려는 힘이다.


내면은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만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목소리를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듣고 있다.


고통은 여전히 크지만, 그 속에서 내면의 지혜 또한 조용히 나를 이끌고 있다. 내가 이 시간을 살아내는 것은 단순한 치료의 과정이 아니라 내면과 화해하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내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내면이란 보이지 않지만 나를 가장 깊이 이끄는 또 하나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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