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1일차의 기록
마치 내 몸이 알람시계가 된 것처럼, 두 시간마다 깨는 새벽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이제는 완벽한 루틴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가끔은 분 단위까지 정확히 맞춰 눈을 뜨는 내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목의 건조함이 예전보다 덜한데도, 이 낯선 루틴은 여전히 이어진다.
아마도 이런 리듬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치유 과정일 것이다.
일요일 아침, 막내는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나갔고, 아내는 아직 깊은 꿈 속에 있었다.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홀로 아침을 준비했다.
예전 같으면 평일에 1일 1식을 하는 내 몸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유를 대며, 주말 아침에는 콩나물 듬뿍 넣은 라면을 끓여 먹었을 것이다.
MSG 가득한 국물, 아삭한 콩나물, 쫄깃한 면발을 목 속에 넘기며 행복감을 느꼈을 것ㅇ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대신 야채 주스를 갈고, 통밀빵과 두유 그리고 야채 샐러드를 냉장고에서 꺼내 간단히 아침을 채웠다.
식탁을 정리한 뒤 서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8월의 여정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치료가 끝났으니 아픔도 끝이라고, 잠시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가 떠오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이 가장 선명하게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요양병원 생활. 그 낯선 공간에서 버텨낸 날들이 이제는 끝났고, 집으로 돌아와 맞이하는 두 번째 주말 아침.
여전히 회복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아침은,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다.
해가 떠오르고, 부시시 잠에서 깬 아내가 눈을 비비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부터 아내와 함께 먹을 점심을 내가 직접 준비했을 것이다.
부엌에서 분주히 냄비를 올리고 재료를 손질하던 나의 모습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미각을 잃은 내가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 이상 간을 볼 수도, 맛을 느낄 수도 없는 내가 만든 음식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들이 먹는 식사와 내가 먹어야 하는 음식은 서로 달라졌다. 부엌에서 나의 자리는 잠시 비워져야 했다.
아내는 어제 산책길에 사온 반찬과 밥으로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챙겼다.
혼자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함께였던 시간의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공백 또한 언젠가 채워질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결국 다시 같은 식탁 앞에서 웃으며 밥을 나눌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예전처럼 점심을 준비하고 맛있게 먹고 또 뒤정리를 하고 다시 저녁을 준비하던 예전의 휴일과는 달리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일이 되었다.
시간이 느리게 마치 멈춘 듯 흘러갔다. 소파에 앉아 무심히 TV 채널을 돌리던 내 손가락을 멈추게 한 건 우연히 마주친 하나의 프로그램이었다.
MBC <손석희의 질문들>. 사회적 이슈의 인물을 초대해 질문과 대화로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오늘의 패널은 올해 4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인물. 바로 전 헌법재판관 문형배 판사였다.
이 프로그램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손석희의 촌철살인 같은 질문이 주는 매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질문들이 ‘사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재판관 문형배’가 아닌 ‘인간 문형배’의 삶과 신념이 이야기되었다. 법복을 벗어던지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배우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맞닿아 나온 또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 자선사업가 김장하.
나는 이미 그의 책 <줬으면 그만이지>를 통해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김장하 어른의 장학생 중 한 명이 바로 문형배 판사라는 사실이 오늘 방송에서 다시금 강조되었다.
40년 전, 등록금을 부탁하며 김장하 어른께 보냈던 문형배의 편지. 그 편지를 떠올리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고 나 또한 따라 눈가가 젖었다.
우리 사회가 아직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고 온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남에게 내어주는 손길이 결국 또 다른 세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사실. 그 감동이 오늘 나의 가슴을 오래도록 울렸다.
인간 문형배라는 인물과 나는 마치 오랜 벗처럼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궁금한 질문을 건네면 스스로 대답을 찾아내며 혼자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의 웃음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한 모습이 내 마음을 흔들었고 함께 울고 웃으며 그 시간을 채웠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세상은 잠시 멈춘 듯 고요했고 휴일의 오후가 그렇게 흘러갔다.
저녁 무렵, 막내는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들어오겠다고 연락을 했다. 집 안은 한결 고요해졌고 아내는 냉장고 속 반찬을 꺼내어 차분히 저녁을 준비했다.
아직 국 없이는 밥을 삼키기 어려운 나를 위해, 아내는 정성스레 미역국을 끓였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퇴원 후 두 번째 일요일 저녁을 함께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천천히 떠먹으며, 오늘 하루와 길었던 8월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서로 다른 마음의 무게를 안고 있었지만 그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하루였다.
이제 9월이 온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다가오는 달.
나는 이 시간을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내고 싶다.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오늘의 고통이 아닌 오늘의 희망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걸음씩 내일로 나아가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