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9월의 첫날은
새로운 시작의 증거였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2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폭염에 갈라진 논바닥 같던 입안의 건조함이 며칠 전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새벽에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침대 옆에 두었던 물병을 치워버렸다.


새벽에 물을 마시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화장실행. 그 반복이 내 잠을 가볍게 만들었다. 결국 깊은 잠을 향한 첫 시도는 그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눈을 완전히 뜬 시점은 새벽의 기운이 동쪽에서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켜 커다란 창 앞에 섰다.


새벽의 공기와 햇살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명상에 잠겼다.


서재로 자리를 옮겨 일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창가로는 따가운 햇살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집 안은 이미 두 사람이 분주히 하루를 준비하는 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가족에게 짧은 미소를 건네며 나도 새로운 9월의 시작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의 첫날이자 일주의 첫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다짐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나는 달력을 펼쳐놓고 작은 계획들을 써 내려갔다. 거창한 목표 대신 다시 시작하는 용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체력 관리를 위해 아주 단순한 운동부터 다시 하기로 했다. 실내 자전거 30분, 팔굽혀펴기, 스쿼트.


모두 예전의 1/3 정도 강도로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내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독서도 다시 루틴에 넣었다. 길게 읽지 않아도 된다. 정해진 시간, 짧게라도 꾸준히 책장을 넘기겠다는 다짐. 그렇게 다시 책과 나 사이의 끈을 잇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지금 거대한 목표나 성취보다 “다시 시작한다”는 그 단순한 기쁨을 내 몸에 새기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을 가장 잘 살아내는 방식일지 모르겠다.


짧게 세운 계획대로 오전을 보냈다. 운동을 끝내고 책상에 앉으니 어제 보았던 어른 김장하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다시금 책 <줬으면 그만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마음속에 오래 머물던 단어 하나, “역경”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다는 건, 거창한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움직임 앞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저 몇 가지 간단한 운동을 했을 뿐인데 몸 전체로 피곤이 밀려왔다. 아직은 예전의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점심은 미리 준비해둔 소고기죽과 미역국, 삶은 양배추, 그리고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콩나물무침으로 차려냈다.


지금의 내게 식사는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맛은 느낄 수 없어도, 의외로 많은 양을 먹었고 오랜만에 배부름이라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하루는 충분히 의미로 받아들기로 했다.


약간의 운동이 남긴 여파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소파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깊은 낮잠을 한 시간쯤 자고 나니, 간밤의 피곤과 운동 뒤의 나른함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간 듯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득 그동안 미루고 있던 건강검진이 떠올랐다.


아내가 입원했던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기본 검진에다 빠짐없이 모든 추가 검사를 넣었다. 아내는 뇌 부위를 제외한 전 항목을, 나는 PET CT를 제외한 모든 검진을 신청했다.


뒤늦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 부부는 서로 아프고 난 이후에야 각자의 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마음이 나를 조금은 안도하게 했다. 결국 지금의 선택은 늦은 게 아니라 필요한 때에 겨우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검진을 예약하면서 나는 알았다. 앞으로의 삶은 ‘무너지기 전에 미리 지키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아프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오늘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른 저녁, 퇴근한 아내와 마주 앉아 식탁에 둘러앉았다. 각자의 음식은 정확히 구분되어 있었지만, 대화만큼은 따뜻하게 한 자리에 섞여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무맛의 식사였고, 아내는 제 몫의 반찬을 챙겨 먹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함께 앉아 오늘 하루를 나누는 그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세운 계획대로 작은 운동을 해냈고 독서도 다시 시작했다. 건강검진 예약까지 마치며 미뤄왔던 일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


그렇게 9월의 첫날을 흔들림 없이 보내고 나니 하루가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을 다짐처럼 붙잡는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작은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천하며 나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결국 내일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게 9월의 첫날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를 채워주며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