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3일차의 기록
어두운 밤, 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눕긴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 밤을 세울바에야 차라리 책이라도 읽는 편이 낫겠다는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스탠드 조명을 켜자 작은 불빛이 방 안을 덮었고 지난주부터 읽고 있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세 번째 이야기 <맥베스>를 펼쳤다.
이미 읽었던 <햄릿>과 <리어왕>과는 결이 달랐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빠르게 사람을 집어삼키고 끝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17세기 초, 그러니까 400년 전의 이야기가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로 다가왔다.
시대와 환경은 변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증거 같았다. 어쩌면 나의 고통도 그렇게 오래된 인간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난생처음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어느덧 서재의 창가 너머로 동녘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밤을 함께 지새운 책 속의 시간과 창밖의 빛이 나를 동시에 감싸 안았다.
몽롱한 정신의 나와는 달리 아내와 막내는 분주히 하루를 시작했다. 현관 앞에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이 떠난 집은 다시 고요 속으로 잠겼다.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며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으니 몸이 곧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침을 먹고 나니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서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문득 떠오른 단어는 “용기”였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꺼낸 <맥베스>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용기란 무엇인지, 욕망과 맞닿은 인간의 두려움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정리했다.
평소 같으면 어김없이 찾아왔을 낮잠도 오늘은 오지 않았다. 마치 지난밤의 긴장과 새벽의 책장이 아직도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비몽사몽한 오후를 서재에서 보내며 결국엔 <맥베스>의 서평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다. 피곤한 몸과는 달리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오늘은 화요일, 볼링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함께 볼링을 치고 회원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루틴이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나의 투병생활을 하는 두 달 동안 아내도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듯하다. 누구보다 볼링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전에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 오늘은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권했다. 또한 교통편도 퇴근 후 딸에게 부탁해 볼링장까지 데려다주도록 했다.
아내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픈 배우자를 두고 혼자 웃고 떠드는 일이 얼마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드는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가 나만 바라보다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의 회복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아내의 삶도 아직 치유의 과정 속에 있으니까.
그에게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이 아내가 오늘은 그럼 오랜만에 한번 다녀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요즘 내가 미각을 잃어 우리 부부는 함께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금주를 하고 그나마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는 먹는 대신 웃고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모임만이 아니라 회원들과 저녁까지 함께 하고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 스스로는 일찍 저녁을 혼자 해결하고 흔적까지 치워버렸다. 빈 식탁에 앉아 있던 나는 문득 웃음이 났다.
아내가 오랜만에 볼링공을 굴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기쁨이었다.
아내를 위한 작은 배려가 결국 나를 위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비몽사몽 정신이 반쯤 깨어 있는 하루였지만 아내가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고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했다.
내가 끝내 얻지 못한 평온을 아내가 대신 누려주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오늘은 내게도 아내에게도 작은 숨구멍 같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