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이른 새벽. 창밖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고, 방 안에는 어제의 열기가 채 빠지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창을 조금 열어두자 새벽 공기가 느리게 스며들었다. 머릿속은 멈추지 못한 채 희미한 피로만을 끌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예전에 읽었던 책들 중 하나를 무심코 꺼내 들었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시기에 가장 먼저 읽은 책이었다.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 문장들을 다시 보니 당시에는 문장보다 문장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지나치게 진지한 삶에 균열을 내는 무심한 통찰.


오늘 다시 그 문장을 읽으니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틀린 것에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틀린 것에서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마크 맨슨의 신경끄기의 기술 중에서


정답.

이 짧은 단어 하나에 내 과거 대부분의 시간이 갇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학창 시절, 인생은 4지선다형 문제집 같았다.


정해진 정답을 찾아내야 했고, 다른 선택지는 모두 틀림으로 간주되었다. 정답을 맞히는 사람은 똑똑했고 오답을 고른 사람은 부족한 존재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언제나 정답에 가까운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리고 오답을 고른 과거의 나를 쉽게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우리는 늘 왜 틀렸는가 만을 고민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정답이 아닌 이유를 찾는 데만 집중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정답이라는 말이 단 하나의 길처럼 굳어지게 되고 다른 가능성은 모두 지워지고 내가 택한 길이 흔들릴 때조차 돌아갈 수 있는 여지는 좁아진다.


삶에서의 정답이란 고정된 지점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항상 조금 덜 틀린 곳을 향해 있다.


때로는 내가 맞다고 믿은 것이 시간이 지나며 오답이 되기도 한다. 혹은 당시에는 틀렸다고 생각한 선택이 돌아보면 가장 나를 성장시킨 순간이기도 하다.


그 아이러니 앞에서 중요한 것은 틀렸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고, 그 안에서 다시 나아가려는 유연함이다.


이런 생각은 특히 투병의 과정 속에서 더욱 깊어졌다. 편도암 진단을 받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며 지나온 시간.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들이 어느 것도 명확한 정답은 아니었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약을 언제 복용할지, 요양병원에 입원할지 말지.


그 어떤 결정도 옳다고 말할 수 없었고, 결과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정답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몸의 상태는 날마다 달랐고 감정은 시시각각 흔들렸다. 때로는 확신이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내가 내린 결정을 믿어야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정답이란 늘 현재형이라는 것. 어제의 기준으로 오늘을 판단할 수 없고, 오늘의 판단이 내일마저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내 투병의 태도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내가 지나온 아픈 시간들도 어쩌면 정답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조금 더 덜 틀리는 사람으로 성장해온 과정이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고 모든 고통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정답’이다.


나는 오늘 '정답'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정답은 완벽을 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덜 틀리기 위해 나아가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