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부터 내린 강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모여든 빗물이 배수구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계절을 환영하는 하모니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마음이 잠시 멈추었고 나는 서재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틈새로 들어오는 빗소리가 온몸을 감싸며 내 마음의 리듬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오래 잊고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내 손이 멈춘 곳은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이었다. 이 책은 작년, 아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시절에 처음 만났다.


하루하루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되던 그때,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딸의 방 책꽂이를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언어를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의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당시의 나를 위로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아내의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무력감 속에서도 책의 한 문장은 내가 여전히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오늘 다시 책장을 펼치니 형광펜으로 그어둔 줄과 짧게 남긴 메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흔적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을 불러오는 창문이었다.


그 흔적들을 따라가며 당시의 불안과 다짐, 작은 희망까지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문장이 오늘 내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기억이 좋으면 좋은 향기로,
그 기억이 나쁘면 나쁜 향기로 말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중에서


기억.

이 단어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또 나는 어떤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흔히 기억을 과거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은 결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미래의 나를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아내가 고통으로 신음하던 병실의 풍경은 여전히 내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순간을 함께 버티며 나눴던 가족의 손길, 작은 웃음, 희망을 나누던 대화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기억은 이렇게 상반된 얼굴을 지닌다.


고통의 기억은 나를 움츠리게 하지만 기쁨의 기억은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결국 삶은 어떤 기억을 붙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지도 모른다.


투병의 시간은 기억의 힘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로 무너진 몸을 부여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자주 과거를 떠올렸다.


가족과 함께 웃으며 식사를 나누던 저녁 식탁, 아이들과 여행을 떠났던 순간, 사소하지만 평범했던 일상의 장면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기억은 단순히 지나간 기록이 아니라 지금 나를 살게 하는 생명의 줄기였다. 좋은 기억은 고통 속에서 빛을 발하며 그 빛은 내가 다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도록 길을 비추어 주었다.


기억은 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다. 내가 건넨 말과 행동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또 다른 기억이 된다. 때론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하고 사소한 친절이 평생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질문은 곧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재의 언행이 결국 미래의 기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을 책임의 언어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내 존재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을 향기가 어떤 것일지는 지금 내가 살아내는 방식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잘 살았다는 평가를 넘어서 내가 남긴 흔적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된다.


새벽 빗소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기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오늘의 말, 오늘의 표정, 오늘의 행동 속에 이미 쌓이고 있다. 지금 내가 선택한 작은 행위와 말들이 모여 내일의 기억을 만든다.


나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내 삶의 향기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 머물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가 따뜻하고 선한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삶은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나는 다시 다짐한다. 좋은 기억을 남기는 하루를 살아가자고.


나는 오늘 ‘기억’ 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