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새벽 방 안으로 들어온 바람은 계절이 어느새 한 발 더 깊어져 있었다. 여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 속에 스미는 가을 냄새가 나를 깨우는 듯했다.
바람 속에 스며 있는 계절의 변화는 오늘 하루를 살아낼 또 다른 동력이 된다. 매일 반복하는 이 루틴 속에서 나는 내 몸의 회복을 확인하고 마음의 중심을 다시 잡는다.
그리고 이 새벽 다시 펼쳐든 손자병법의 해석을 통해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조용히 비교한다. 책 속 곳곳에 붉게 그어진 밑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줄은 지난날의 내가 감동하거나 멈추었던 지점의 흔적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저 문장을 표시했을까. 지금 다시 읽으며 같은 문장을 밑줄 긋게 될까. 아니면 다른 부분에서 멈출까.
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 책을 읽는 나는 변한다. 독서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다시 펼칠 때마다 그 책은 또 다른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오늘 내 시선을 붙잡은 문장은 이렇다.
“젊을 때는 자기 홍보도 좀 필요하겠지만
특히 오십 이후에는
능이시지불능(能而示之不能-능력이 있어도 없는 듯 대하라)이
겸손한 마음과도 결을 같이하면서도
중년의 태도에서 중요한 덕목으로서 꼭 필요해 보입니다.
실천적인 방법으로는
상대에게 말을 많이 시키고 나는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 중에서 - 148page
겸손.
이 단어는 최근 들어 나에게 전혀 다른 빛깔로 다가왔다. 젊을 때 내가 생각하는 겸손은 전략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자만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기회를 엿보는 계산된 행위였다.
그러나 중년이 된 지금 그리고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만난 겸손은 그런 얄팍한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겸손은 삶을 지탱하는 태도로 바뀌고 있다.
손자의 말처럼 있는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없는 능력을 억지로 꾸미지 않고, 그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겸손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게 찾아온 “암”이라는 존재는 나를 단번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힘이 오늘은 힘든 짐이 되었고 의지만으로 버틸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그 순간 나는 내 능력이 얼마나 작고 덧없는 것이었는지를 절실히 알았다. 겸손은 그 무너짐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때의 겸손은 자존심을 낮추고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정직함이었다.
겸손은 나를 위축시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세우는 뿌리였다. 상대의 말을 더 많이 듣고 내 말을 줄이는 태도는 단순히 예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다. 병상 위에서 나는 그 용기를 배웠다.
무조건 이겨내겠다는 다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약해졌음을 인정하고, 여전히 배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태도였다. 겸손은 그렇게 나를 지켜주었다.
지나온 오십의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성공과 성취라는 이름으로 겸손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드러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를 지탱한 힘은 결코 나만의 능력이 아니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땀, 가족의 보살핌, 나보다 앞서 걸어간 이들의 가르침이었다.
결국 나를 세워준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가 기댈 수 있었던 수많은 관계였다. 그것을 깨닫게 된 지금,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삶을 이어주는 고백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 깨 달았다.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확장의 길이다. 스스로를 낮출 때, 타인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낮추는 만큼 내 시선은 넓어지고, 그만큼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겸손은 관계를 지키고 나를 성장하게 한다.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지켜야 할 태도는 화려한 성취가 아니다. 조용히 경청하고 묵묵히 실천하는 겸손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좋다. 대신 남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배우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 것 이야말로 오십 이후 아니 앞으로의 내 인생을 지켜줄 태도다.
나는 오늘 ‘겸손’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받아들여 삶을 확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