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새벽을 두드리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은 어둠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에도 빗소리는 분명하게 대지를 적시는 힘을 전하고 있었다.
마치 삶의 어느 순간에도 방심하지 말라는 일깨움처럼 다가왔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손자병법을 통해 다시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문장을 다 해석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품고 나머지는 시간이 흘러 더 성숙해진 내가 다시 꺼내 읽을 것을 약속하며 책장을 덮었다.
그 마지막 문장 속에 남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십은 인생에 익숙한 나이대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고는 익숙함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합니다.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10년 전에도,
어제도, 그제도 했던 일이라 내일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과거와는 전혀다른 새로운 날입니다.
그럼에도 착각에 빠지는 것은
여태까지 연속돼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일종의 함정이고 방심입니다.
오십에는 이런 믿음과 방심이
편견과 고집으로 자리 잡기 쉬운 나이입니다.”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 중에서 - 295page
방심.
나는 최근 몇 년간 이 방심이라는 단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남들보다 빠른 출발을 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고 조금은 빠르게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수많은 신호들을 무시했다. 그 무시는 곧 방심이었다.
작은 피로와 불안, 몸의 이상 신호들을 ‘괜찮다’는 말로 덮었고 결국 그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병상으로 몰아넣었다. 늦게서야 그것이 방심의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심은 단순한 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익숙함이 주는 달콤한 함정이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교만이다. 늘 해왔던 방식이니 늘 걸어온 길이니 내일도 무사히 이어질 것이라는 자기 암시 속에서 진짜 위험을 놓치게 된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렇다. 업무의 과중함을 핑계로 건강검진을 미루고 가족의 조언을 ‘괜찮다’며 흘려보내며 몸속에서 켜진 적색등을 못 본 척 지나쳤다.
결국 그것은 “암”이라는 두려움의 존재로 내 목에 자리를 잡았고 그 검은 작은 덩어리가 나를 멈추게 했다.
투병의 시간은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 매일 확인하게 한다. 치료 과정 하나하나가 내게 ‘더 이상 방심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음식 하나를 먹을 때에도 작은 피로가 쌓일 때에도 잠깐의 나태함이 찾아올 때에도 그것은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내 생명을 지탱하는 중요한 선택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제는 작은 신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방심하지 않으려는 다짐은 곧 살아있음을 지키는 다짐이다.
방심은 어쩌면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우리는 안정을 원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예측 가능한 내일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측 가능한 내일이란 없다. 변화와 무상함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익숙함 속에 안주하며 그 안주가 곧 방심이 되어 자신을 무너뜨린다.
오십 이후의 삶은 특히 더 그렇다. 과거의 경험이 쌓인 만큼 그것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결국 저자의 말처럼 그것이 편견과 고집으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더더욱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제 방심을 삶에서 경계의 언어로 삼으려 한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울타리다.
작은 몸의 변화에도 귀 기울이고, 익숙함 속에서도 늘 새로운 배움을 찾으며 내일은 오늘과 같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을 다시 살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병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오늘 ‘방심’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방심은 익숙함이 만들어낸 착각이자, 삶의 무너뜨리는 가장 은밀한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