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긴 연휴가 끝난 새벽, 마치 장마처럼 거세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재 창문을 스치는 빗방울 소리와 도로를 달리는 차의 물살 가르는 소리가 겹쳐지며 마치 자연과 도시가 만들어낸 하나의 교향곡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나는 다시 의자를 당기고 책을 펼쳤다. 어제 읽다 덮은 매슈 워커의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였다. 책의 문장은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었다.


아무리 요약한 문장만 읽고 넘어간다고 해도 앞뒤 문장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 시간 남짓한 새벽의 독서 시간 동안 500page가 넘는 책을 전부 넘기기 어려웠다. 조금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챙겨 읽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의 나를 멈추게 만든 문장은 짧고 명료했다.


“뇌의 수많은 기능들은 잠을 통해 회복되고 잠에 의존한다.”

우리는 왜 잠을 자야할까 중에서 -


의존.

짧은 문장 속에 들어있는 한 단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흔히 의존이라 하면 스스로 하지 못해 남의 힘을 빌리는 상태의 약함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문장을 곱씹을수록 그것은 단순한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뇌는 잠에 의존한다. 그것은 뇌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의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작용이다.


잠이 없으면 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인간은 존재의 균형을 잃는다. 의존은 결핍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연결의 과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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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존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로 연결된 태아는 산소와 영양을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


그 의존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생명은 세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단방향의 의존이 아니다. 어머니 또한 그 작은 생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느끼고 그 관계 속에서 모성이 형성된다.


의존은 누군가의 약함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의존이란 결국 연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세상과 연결될 때 비로소 ‘나’를 느낀다. 뇌가 잠에 의존하듯 마음은 관계에 의존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하나가 무너져 가는 마음을 다시 세운다. 그렇기에 진정한 회복은 혼자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연결 속에서 가능하다.


그 연결은 때로는 가족의 사랑으로, 친구의 안부로, 혹은 책 한 권의 문장으로도 완성된다. 내가 지금 이렇게 새벽의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결국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또 다른 의존의 형태다.


의존이 관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연결은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다. 연결의 끈이 단단할수록 인간은 외로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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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삶에 닿아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연결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는 투병의 시간 동안 이 단어의 무게를 깊이 체감했다.


병상에서의 일상은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른다. 혼자서는 도무지 일어설 수 없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에 의존해야 했다. 주사를 놓던 간호사, 처방을 내리는 의사, 부축하며 길을 안내하는 딸, 물 한컵을 건네던 아내, 그리고 수많은 연결들.


또한 새벽마다 나를 일으키는 작은 루틴조차도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의존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부끄러웠다. 스스로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존은 수치가 아니라 연결의 징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함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잠이 뇌를 회복시키듯 관계는 인간을 회복시킨다. 고립된 자존심보다 서로 기대어 버텨내는 연대가 결국 인간을 지탱한다. 진정한 의존은 스스로의 회복을 향한 용기이며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의 확장이다.


가을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번쩍이는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에 일렁이며, 마치 누군가의 숨결처럼 살아 움직였다.


이 새벽의 비 또한 땅에 의존해 흐르고 구름에 기대어 다시 하늘로 오른다.

자연의 순환이란 결국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기대어 이루는 거대한 생존의 연결고리 아닐까.


나는 오늘 ‘의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의존은 한쪽의 기댐이 아니라, 서로의 생존을 위한 연결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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