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생일날 가족이 함께 하는
하루의 소중함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73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창문을 살짝 열자 한 줄기 바람이 서재로 스며들었고,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은 채 ‘투자’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경제의 언어로만 이해했던 그 단어가 이제는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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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회복시키는 일 또한 결국 나를 향한 가장 근본적인 투자였다.


오전의 생각을 글로 옮긴 뒤 창밖의 바람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 거실에서 페달을 밟았다. 땀이 흐르기 시작할 즈음엔 머리도 맑아졌다.


회복이란 결국 이런 일상의 꾸준함 속에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고 있다.


오후에는 <오만과 편견>의 생각을 마무리하는 글을 썼다. 조연들이 아닌 이번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수기로 남겨둔 메모를 다시 펼쳐보았다. 메모 사이에는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문장 하나, 인물 하나를 되짚으며 나는 다시 그 세계를 걸었다. 오해를 넘어선 네명의 주인공들의 진심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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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 역시 오랜 시간 ‘편견’에 둘러 쌓여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딸의 생일이었다. 저녁 무렵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다. 예전 같으면 단순한 생일 외식쯤으로 여겼겠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특별한 기념이 된다.


항암 후 식단에 제약이 많은 내게 맞춰야 했기에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딸은 웃으며 말했다.


“야채도 많고, 국물도 담백해서 아빠도 먹기 좋을 거예요.” 그렇게 선택된 메뉴는 샤브샤브였다.


매운 음식과 날것을 피해야 하는 나를 위해 메뉴를 고민했을 딸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잠시 미안한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곧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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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것 또한 나의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먹는 음식이 본질은 아니니까.


만약 내 몸이 예전 같았다면, 그 자리에서 뭉티기나 대방어회, 해물찜을 놓고 소주 한 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따뜻한 국물과 담백한 채소, 그리고 가족의 웃음소리가 그 어떤 술잔보다 깊게 마음을 적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딸의 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딸 생일인데 케잌에 촛불정도는 켜야지 하고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 오늘의 또 다른 이유, 후츄.


몇 달 전, 여러 사정으로 딸의 집으로 보냈던 녀석을

오랜만에 보고 싶은 것이었다.


집 초인종이 울리자 녀석은 현관 쪽으로 달려 나왔다. 역시나 녀석은 나에게 본체만체였다.


잠시 서운했지만, 어쩌면 그게 더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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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니까.


대신 아내에게는 이리저리 볼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채취를 남기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내의 얼굴엔 금세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오늘의 하루가 이미 충분히 선물 같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잌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식구들을 형식을 위해

작은 조각 케잌을 준비했다. 초를 꺼내 불을 붙이고,

생일 노래를 함께 불렀다.


작은 불빛이 딸의 얼굴을 비출 때,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꼈다. 병의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한 건, 이런 소박한 장면들이었다.


짧은 생일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은 행복한 미소로 가득했다.


아내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래도 건강하게 네 식구가 모였네…” 하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병실의 하얀 벽만 바라보던 날들, 치료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결국 오늘의 웃음을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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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그저 ‘가족이 함께 있는 하루’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병을 앓으며 잃어버린 것들만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런 평범한 날들이야말로 내가 다시 얻은 삶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창문 너머로 스치는 늦가을 바람과 높이 떠오른 달의 모습이 오래도록 그 따뜻한 웃음소리를 안고 흘러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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