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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매서운 추위가 찾아온 새벽이었다. 베란다의 공기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고 어두운 새벽 창밖에서 겨울 손님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나의 이기적 유전자의 내면에 숨겨있는 이타적인 나를 발견해준 책을 제자리에 두고 다음 책을 고르기 위해 잠시 시선을 멈춰세웠다.


책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붙잡아 온 책들은 모두 조금씩 차갑고 어두웠다는 사실을.


이기적 유전자, 다크 심리학, 수용소의 하루, 몸이 싸늘한 계절이라 마음도 그 풍경을 닮아가며 나도 모르게 더 냉담한 문장들을 따라 읽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나를 붙잡은 단어들도 조금은 차가웠던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주는 마음이 따뜻한 책을 손에 들기로 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의 시작은 함께 한 책은 황보름작가의 에세이 <단순 생활자>였다.

“단 한 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는 것.


이 상태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휴식이었다.”

단순 생활자 중에서 - 6page


휴식.

1. 몸이나 마음의 피로를 풀기 위해 활동을 멈추고 편안히 머무르는 상태

2. 활동을 중단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


사전적 정의는 이렇게 단순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늘 어렵게만 받아들여 왔다. 쉬지 않고 살아왔다는 말이 평생 나의 자랑처럼 따라붙었고 사람들은 “너는 참 부지런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말들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졌다.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사실은 곧 쉬는 법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투병 생활이 시작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쉬지 않았다. 몸은 멈춰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달렸고 생각은 끊임없이 앞서가며 나를 몰아세웠다.


병상에서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는 압박만이 나를 끌었다. 그 속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쉬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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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두려웠다.


몸이 멈추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생각이 고요해지면 병의 그림자가 더 크게 다가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멈추는 법을 끝까지 배우지 못한 채 회복의 시간마저 ‘견뎌내는 과정’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오늘 새벽 나는 조금 달라졌다. 황보름 작가가 말한 그 “가벼운 상태”라는 표현이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잔향처럼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 무거운 상태로만 살아왔던 것 같다.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무거웠고 가장이라는 이유로 무거웠고 병을 이겨내야 했다는 절박함 때문에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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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움 속에 익숙해지면 가벼움을 잊는다.


요즘 들어 가끔 깨닫는다. 병은 내게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동시에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 그중 하나가 휴식이다.


휴식은 몸과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삶의 의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을 겪은 뒤 나는 삶이 늘 선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든 멈출 수 있고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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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과 멈춤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능력이

바로 휴식이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휴식을 모른 채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을 지나왔기에 이제야 조금씩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나는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가? 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본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달려가는 삶은 이미 충분히 살아봤다.


이제는 잠시 멈춰 가벼운 상태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해야 하는 일 대신 좋아하는 일을 붙잡는 연습.

의무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용기.

멈추어도 괜찮다는 마음의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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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부가 내게는 회복이고 동시에 휴식일 것이다.


오늘 새벽의 차가움 속에서 나는 조금 따뜻해졌다.


겨울의 문턱에서 깨닫는 휴식의 의미가 이토록 깊고 조용한 위로가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이제야 조금씩 배워간다.


멈추어도 무너지지 않으며 가벼워지는 일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쉬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앞으로 남은 시간을 더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기술이라는 사실을 단순생활자를 통해 배워간다.


나는 ‘휴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휴식은 멈춤이 아니라 계속 걸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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