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오르기 전의 어둠이 깔린 서재는 밤새 식어버린 공기가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어 새벽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차가움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 차가운 기운 속에서 나는 오늘도 책상 앞 의자에 조용히 앉아 커튼을 젖히고 어둠 속 새벽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흡혈박쥐는 기분 좋은 새로운 신화
즉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신호의 선봉이 될 수 있다.
흡혈박쥐는 이기적 유전자에 지배되면서도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는
따뜻한 생각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유전자 중에서 - 428page
협력.
1. 둘 이상의 존재가 같은 목적을 향해 각자의 힘을 보태는 일.
2. 각자의 능력과 자원을 연결해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닿게 하는 과정.
사전적 정의는 단순했지만 그 단어는 간밤에 묵묵히 내려 앉아 쌓인 새벽 공기보다 더 깊은 층을 품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협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도킨스가 말하는 협력은 인간의 도덕이나 선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이었다.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살아가는 생명체에게는 생존의 언어라는 사실이 문장 사이에서 슬며시 드러났다.
이기적 유전자는 각 개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유전자의 계산 끝에서 결국 선택되는 것이 협력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했다.
이기적 구조가 만들어낸 가장 이타적인 형태로 구성된 개인의 생존 본능이 결국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진실이라는 이 아이러니에서 오래 멈추었다.
생존을 위해 나의 안쪽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던 무의식적 이기심조차 결국 누군가의 손을 찾게 만드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필요 속에서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가 또 다른 생존의 기반이 된다.
이런 구조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지금 지난 투병의 과정을 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그 시간을 협력 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
아내가 해준 곰국, 낯선 병원에서 날 이끌어준 딸,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를 물어오던 두 아들의 메시지 그리고 나를 걱정해준 모든 인연들의 보이지 않는 응원들.
이 모든 것들이 내 생존의 기초였다.
살아남기 위한 최소의 힘을 나누는 일.
그 힘이 모이면 차갑고 식어 있던 마음도 조금 덜 외로워지고 한 걸음 더 앞으로 갈 수 있게 된다.
협력은 감정의 영역에서도 작동한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단순히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행위이다.
상대가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이유가 동시에 드러나는 순간이야 말로 인간 관계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생각에 기반하다 보면 협력이란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결핍이 있어야 연결이 생기고 연결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고 생존이 가능해야 새로운 하루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협력은 생존의 결과이자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을 읽으며 이해는 하지만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존재했다.
협력은 이기심의 반대편에서 피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기심의 연장선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필요가 되풀이되며 관계는 지속된다.
겉으로는 이타처럼 보이지만 바닥에는 모두의 생존 본능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이 오히려 협력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했다.
인간이 완벽하게 이타적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할 때 오히려 모든 관계는 더 솔직하고 단단하게 이어진다.
완벽한 선의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가
서로를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의 진실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협력은 그래서 더 귀하고 더 인간적이었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내 안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그 이기심이 나를 살리기 위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게 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되었다.
협력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다.
오늘의 새벽 공기는 어제보다 더 차가웠다. 그러나 이 글을 적으며 나는 그 차가움 속에서 조금은 덜 흔들렸다.
누군가와 협력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남은 생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살아남으려고 서로를 붙드는 이 과정이야말로 생명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지혜라는 것.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내게 알려준 교훈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그리고
나는 ‘협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협력이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내미는 가장 인간적인 손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