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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남은 달력 한 장속에 담긴
아쉬움과 희망.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9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주말 대전에서 보낸 시간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온기 그 자체였다.


가족들과 나눈 짧지만 깊은 대화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스치는 손길, 오랜만에 함께 웃던 순간들이 아직도 가슴 한쪽에 은은하게 머물러 있다.


그 순간의 공기와 표정들이 마음을 채워주었지만, 몸은 그 따뜻함을 모두 따라오지 못한 듯 오늘 아침은 유난히 무겁고 느리게 시작되었다.


밤사이 쌓인 피로가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느낌,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근육 곳곳이 조용하게 항의하는 듯한 기운이 있었다.


따뜻함과 피곤함이 뒤섞인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어제의 여운과 오늘의 하루가 겹쳐지는 기묘한 순간을 지나왔다.


아내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온 삭신이 아프다는 신음 같은 소리를 내었고 오늘은 칼퇴해서 좀 쉬어야겠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차한잔을 내려 서재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아 붉은 색 펜으로 가득찬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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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달력 속에 붉은 펜으로 적은

나의 운동 루틴을 들여다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감기로 인해 일주일 쉬었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체력과 면역력 강화를 위한 나와의 약속을 지켜낸 한달이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11월의 마지막 달력을 조심스레 뜯어냈다. 얇은 결이 손끝에서 떼어지는 순간, 벽에 남은 단 한 장의 달력 뒤로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직 한 달이 남아 있는데도 마치 올해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올해 1월의 달력을 뜯었을 때 느껴지던 묵직한 여유, 앞으로 채워갈 열한 달이 만들어주던 두터운 온기와 기대는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한 장은 어떤 공허함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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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잠시 눈길이 벽에 걸린 달력 전체로 향했다.


11월과 12월, 그리고 바로 아래에 자리한 2026년 1월이 한 화면에 들어오자 마음 한쪽에서 묘한 감정의 결이 스쳤다.


보내야 하는 해와 맞이해야 하는 해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아련했고, 동시에 벅찬 느낌을 전해주었다.


2025년이라는 무거운 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과 공허함이 있었지만, 바로 그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2026년 1월은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11월과 12월은 늘 정리와 마무리의 기운을 품고 있지만, 올해의 마지막 달력은 유난히 감정의 온도가 극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날짜 배열이겠지만, 치료를 버텨내며 살아온 내게는 지나온 시간의 무게와 살아낼 시간의 가능성이 동시에 붙어 있는 패턴처럼 보였다.


한쪽에서는 ‘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손을 내미는 것 같은 이중의 감정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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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한 장의 무게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


겨우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그 뒤편에 남은 것은 더 이상 펼칠 수 없는 시간의 벽이었다. 그 벽의 차가운 온도는 지난 1년 나를 지키던 무의식의 감정들을 건드렸다.


올해의 시간들을 조용히 떠올렸다.


암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날의 손 떨림, 병원 복도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감싸던 불안,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몸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들, 그리고 견뎌내기 위해 수없이 스스로를 다독이던 날들.


어둡고 고요한 터널 같았던 그 시간을 지나, 지금 이렇게 다시 일상의 벽에 달력을 걸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달력 한 장이 남았다는 사실은 미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까지 잘 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시간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 몸을 다시 배우고,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무엇보다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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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되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벽에 남은 마지막 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올해도 끝까지 잘 살아보자.”


차갑게 느껴지던 벽의 온도도 잠시 지나니 조금은 익숙해졌다. 마치 아픔을 지나오며 배운 것처럼, 처음엔 버겁고 낯설었던 모든 감정이 결국엔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듯이.


오늘 나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보며, 지나온 시간을 감사와 안도의 마음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남은 12월을 향해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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