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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해가 뜨기 전 새벽의 어둠은 오늘따라 더 묵직했다. 기온이 뚝 떨어진 공기는 몸의 표면에서 바로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뒤에 차가운 벽에서 느껴지듯 이제 초겨울의 숨결이 폐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책장을 펼치며 오늘 떠올린 문장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반응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 378page



대항.

1. 상대의 힘, 주장, 행동등에 대응하여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것

2. 두 존재가 힘, 의견, 행동을 두고 직접 부딪히는 상태


나는 책을 펼쳐놓고 문장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무엇인가를 거스른다는 것은 단순히 반발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에너지이기도 했다.


대항이라는 단어의 개념부터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대항은 꼭 거창한 권력이나 거대한 존재를 상대로 하는 행동이 아닐 것이다. 내 안에 이미 뿌리를 내려 자리 잡은 오래된 본능과도 마주서야 하는 일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자기 복제자의 폭정’이라는 표현은 결국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원초적 프로그램을 뜻한다.


유전자는 생존을 위해 최적의 조건을 만들려 하고 때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보다 앞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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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이란 그 힘에 순순히 끌려가지 않겠다는

결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감정이 따라왔다. 투병을 통해 나는 너무 많은 순간을 무기력하게 흘려보냈다고 느낀 적이 있다.


몸의 통증과 두려움, 예측할 수 없는 변화들은 내 의지를 자꾸만 움츠러들게 했다.


암이라는 존재는 유전자의 흔들림 이후에 찾아온 거대한 파도였고 나는 처음엔 그 파도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고 일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문득 알게 되었다.


대항은 병을 이겨내는 싸움이 아니라 그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까웠다는 것을.


실천은 아주 작은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물 한잔을 천천히 마시는 일,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한 문장을 붙잡는 일, 짧은 명상을 하며 오늘의 나를 확인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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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순간들이 모여

‘대항’의 형태를 만들었고

나는 그 힘을 조금씩 체감했다.


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몸을 불평하기보다 그 몸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선택을 반복하는 행동들이 결국 나는 나로 살아가겠다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었다.


새벽 떠오르는 햇살을 보며 생각해보니 위로도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항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행동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유전자가 정해놓은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인간은 단지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나의 감정과 판단, 나의 결정을 통해 내 삶의 길을 다시 그릴 수 있다.


나의 병도, 나의 회복도, 나의 글쓰기 역시 모두 대항의 연속이었다.


몸이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시 일어나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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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택의 반복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결국 대항은 파괴를 위한 힘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사용하는 최소한의 본능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를 손상시키는 본능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그 본능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는 언제나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멈추지 말라고.

끌려가지 말라고.

오늘의 나를 잃지 말라고.


나는 ‘대항’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대항은 본능이 정해놓은 길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려는 나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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