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차갑고 어두운 새벽이었다. 아직 밤의 온기가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시간에 창밖은 깊은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았고 오늘은 어떤 단어와 마주하게 될지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오늘의 선택은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온 연대기식의 역사가 아니었다.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어떤 힘에 의해 선택되고 배열되었는지를 묻는 책이었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이 책은 역사를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권력이 만든 해석의 구조로 바라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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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작년 여름의 어느 날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 이 책을 만나기 전 나는 역사는 이미 완성된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진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오늘 다시 첫 장을 넘기기 전 나는 목차를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예전에 남겨두었던 밑줄과 메모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 문장들 사이에서 유독 시선을 붙잡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생각들은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는 누구일까?

이런 얘기는 진짜일까?

믿을 수 있는 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이 사실은 거짓말 이라면,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세계를 움직인 열가지 프레임 중에서 - 14page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단어로 나를 이끌었다.


진실.

1. 꾸밈이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

2. 겉모습이나 주장 뒤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는 것.


사전적 정의는 단순하지만 현실 속 진실은 늘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책이 말하는 진실은 감정이나 추측의 영역이 아니었다.


저자는 의심을 던지되 근거 없는 의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수많은 사료와 기록 그리고 역사적 증거를 통해 왜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의도가 개입된 선택이었다. 역사는 늘 사실 위에 서 있지만 그 사실을 어떤 순서로 보여주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지우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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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숨겨진 음모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 문장을 읽으며 조금 불편해졌다. 그동안 너무 쉽게 받아들여온 이야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의심해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진실은 늘 새로운 정보보다 기존의 안락함을 흔들 때 더 불편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권력은 여전히 특정한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뉴스의 제목과 숫자의 배열. 반복되는 이미지와 선택된 단어들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길들여진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반드시 거짓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보여주지 않으면 되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충분히 복잡한 정보 속에 섞어두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멈춘다.


그래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고 느꼈다.


의심할 수 있는 힘, 자료를 확인하려는 끈기,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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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모두에게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얼굴로 나타난다.


지금까지의 믿음을 수정해야 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회피의 대상이 되기 쉽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투병 과정을 떠올렸다. 병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막연한 희망과 애매한 긍정 속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병은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정확한 진단과 수치 그리고 냉정한 설명 앞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선택해야 했던 태도 역시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과장된 두려움도 근거 없는 낙관도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아직 불가능한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진실을 외면하면 마음은 잠시 편해질 수 있다. 그러나 회복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병을 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선택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치료도 휴식도 계획도 모두 사실 위에서만 의미를 가졌다.


역사도 삶도 결국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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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에 갇히면

판단은 줄어들고 책임은 사라진다.


그러나 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선택의 주체가 된다. 그 선택은 때로 무겁고 불편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동반한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진실은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내려는 태도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태도는 연습을 통해서만 길러진다는 사실이었다. 읽고 생각하고 확인하는 반복 속에서만 눈은 조금씩 밝아진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나는 다시 잠시 책을 덮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또렷해졌다.


오늘 내가 마주한 진실은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불편하더라도 사실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방향.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진실이란 눈을 가리는 프레임을 벗겨내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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