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흐릿한 시간에 나는 늘 그렇듯 조용히 앉아 책을 펼쳤다.
몸은 회복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예민한 상태로 하루를 맞이한다. 이 시간의 차분함이 나를 조금 덜 흔들리게 만든다.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의 숨은 이면을 들여다 보는 이 시간 오늘 나의 시선을 붙잡은 문장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었다.
“이 논의들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추정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법학에서 의학, 정치, 국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주제를 다루고
또 전문성도 드러나기에, 지방에 거주하던 볼품없는 워릭셔 지역 장갑 제작자의 아들이 쥔 깃펜 끝에서 튀어나온 내용일리 없다는 것이다.”
3장 펜은 칼보다 강하다 중에서 - 96page
추정.
1. 주어진 자료나 정황을 토대로 어떠할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판단하는 것.
2. 완전한 증거가 없을 때 논리적, 경험적 판단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행위.
사전적 의미의 정의만 놓고 보면 추정은 인간적인 사고의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서 시작된다.
추정은 어디까지나 예측의 범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계를 너무 쉽게 넘는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생각을 마치 확정된 사실처럼 다룬다.
추정은 어느새 확신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선다.
나는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이 감각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경험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에는 수많은 추정이 떠올랐다.
이 정도 수치면 분명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과 이런 통증은 이전과 다르다는 짐작들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었지만 내 몸은 이미 확신처럼 반응했다.
잠을 설쳤고 숨이 가빠졌으며 마음은 앞서 무너졌다. 아직 오지 않은 결과가 이미 현실이 된 것처럼 나를 압박했다. 그 순간 나는 추정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해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추정은 생각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러나 확신으로 착각되는 순간 그것은 결론이 된다.
질문은 사라지고 선택지는 닫힌다.
그런 추정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미리 살아버린다. 또한 우리 사회는 이 착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와 단정적인 문장,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정보의 편향, 댓글과 통계와 그래프는 추정을 빠르게 확신으로 몰아간다.
충분히 모른다는 말은 약한 것 처럼 취급된다. 기다려보자는 태도는 무능으로 오해받는다. 그 자리에 빠른 판단과 선명한 결론이 들어선다.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심은 본래 탐색의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의 의심은 공격의 도구가 된다. 결국 의심이 기반된 추정은 질문이 아니라 낙인이 된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여지가 사라진 자리에 확신만 남는 것이다.
병실에서 나는 이 구조를 더 선명하게 보았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이미 마음속에서 내려진 결론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확신은 증거 없이도 사람을 아프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습하기 시작했다.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는 연습.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판단을 유예하는 연습.
추정을 추정으로 남겨두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연습.
이 연습은 생각보다 어렵다.
불안은 늘 결론을 원하기 때문이다. 확신은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그 확신이 틀렸을 때의 대가는 늘 더 크다.
추정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여야 한다. 아직 알지 못함을 인정하는 겸손이어야 한다. 확신은 증명의 몫이지 상상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도 결국 같은 지점에 서 있다. 그가 실제로 누구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작품의 깊이와 작가의 삶을 연결하려는 시도 역시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문학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질문으로 남아 있어도 충분하다.
작품이 위대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작가의 출신과 신분으로 증명될 필요는 없다.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상상으로 빈칸을 채운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곧 사실처럼 굳어진다.
셰익스피어가 귀족이었어야만 그의 문장이 설명된다는 생각, 지방 출신의 평범한 사람이 그런 통찰을 가질 리 없다는 단정, 이 지점에서 추정은 더 이상 학문적 질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편견이 논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문학이든 삶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에 명확한 결론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은 사유의 깊이를 오히려 얕게 만든다.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외면하며 그 안에 무언가를 억지로 채워 넣으려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너무 빨리 해석해 버린다. 정황 몇 가지로 마음을 재단하고 의도를 확정해버리는 것이다.
그 추정이 확신이 되는 순간 관계는 경직된다. 그렇다면 추정이 어설픈 확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새벽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모든 생각을 빨리 정리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의심을 즉시 결론으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또한 추정 앞에서 한 박자 늦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생각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새벽에 앉아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지금의 짐작이 전부가 아니라고 아직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가능성이라고 추정을 추정으로 남겨두어도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나는 ‘추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추정이란 닫아버릴 결론이 아니라 끝까지 열어두어야 할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