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창밖의 공기는 더욱 차갑고 고요하게 스며들었다.


늘 그렇듯 같은 시간에 몸을 일으켜 따뜻한 차와 함께 책상 앞에 앉는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억울함 조차 표현하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게 되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반복된 루틴 속에서 오늘은 유독 한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 사회의 구조에 거의 똑같이 해를 입힌다.


바로 바쁨이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빠쁨이란 존재 상태이자 지위의 상징이다.

바쁨은 영광의 휘장이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바쁘다는 것은 좋다.”

6장. 시간은 돈이다 중에서 - 227page



바쁨.

1. 할 일이 많아 몸이나 마음에 여유가 없는 상태.

2.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태.


지난 사흘 동안 인천에서 오랜만에 나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바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요즘 같은 시기에 바쁘면 좋은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을 수도 있고 격려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어떤 전제를 품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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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바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기준을 다시 확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 질문을 그 자리에서는 하지 않았다. 대화는 늘 그렇게 다음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그 말이 어쩌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쁨을 긍정하는 말은 쉽게 나오지만 그 결과는 쉽게 감당되지 않는다.


그 말은 상대의 상태를 이해하기보다는 사회의 기준을 대신 전달한 말이었을 수 있다. 나는 그 기준을 무심코 반복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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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쁨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개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언제부터 인가 이 단어는 사회가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는 설명을 생략하게 만들고 질문을 차단한다.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현실에서의 바쁨은 단순히 일이 많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바쁨은 일의 양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되었고 존재 방식으로 굳어졌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바쁘냐가 더 중요해진 구조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바쁨은 이제 미덕에 가까워졌다. 바쁘다는 말은 성실함과 책임감을 암시한다. 반대로 한가하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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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바쁘지 않다는 상태를 불안해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구성물 안에서 살아간다. 이 구성물은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할 일이 많아질수록 시간은 부족해지고, 시간이 부족할수록 더 많은 일을 끌어안게 된다.이 구조 속에서 바쁨은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은 선택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쁨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요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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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늦추는 순간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이 작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는 감각이 일상이 되었고, 바쁨은 생존의 조건처럼 받아들여졌다.


나 역시 이 구조 안에서 오랫동안 바쁨을 선택해왔다.


바쁘게 산다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며 나를 돌아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쁨은 나를 유능하게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며 몸의 신호를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바쁨은 그 신호를 해석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피로는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통증은 참고 넘길 문제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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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몸의 경고를 미뤘다.

그 미뤄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 결과는 투병이라는 형태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나는 바쁨이 남긴 값을 마주하며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바쁨은 성취가 아니라 누적된 부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투병의 시간은 바쁨이 허락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그 속도를 유지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질문은 불편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안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우리 사회에서 바쁨은 어느 순간부터 효율의 언어로 포장되어 왔다. 그러나 효율은 언제나 목적을 묻지 않는다.


얼마나 빠르게 처리했는지는 중요하지만, 왜 그것을 해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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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쁨은 질문 없는 성실함을 양산한다.


이제 나는 바쁨을 다시 바라본다. 바쁨은 열심히 산다는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삶을 점검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바쁨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사회는 여전히 속도를 요구하고, 결과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나의 몸을 기준으로 판단하려 한다. 지속할 수 없는 속도는 성실함이 아니라 위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값은 결국 개인이 치르게 된다.


나는 ‘바쁨’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바쁨이란 성실함의 증명이 아니라, 돌아보지 못한 삶이 남긴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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