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2026년의 두 번째 새벽이었다. 냉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베란다를 채우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도 베란다 창문에 기대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새해라는 이름만 새로 붙었을 뿐 풍경은 변함없이 그대로 였다.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건너편 아파트 불빛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에 켜졌다.
이른 새벽 쓰레기차의 거친 엔진 소리는 알람처럼 울려 퍼졌다. 아, 오늘도 하루가 성실하게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어디선가 자신이 숫닭인지 개인지 존재감을 상실한 커다란 반려견의 하울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하루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안다.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간에 변함없음이 이렇게 정확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짜증의 단계를 넘어서 가끔은 멜로디처럼 들리는 환청도 경험하는 수준이 되었다.
집 안에서도 변함없는 것과 변한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막내의 귀가 시간은 이제 자유 이용권을 얻은 상태다.
그리고 그 방에서 풍기는 공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동안 막내의 방에서 풍겨오는 청년 남성의 호르몬 냄새에 술 냄새가 옵션처럼 추가됐다.
문을 열 때마다 이 문을 닫아야 할지,
마음을 닫아야 할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또한 성장 과정이라며 스스로에게 설명서를 붙여본다. 부모 노릇에는 언제쯤 숙련도 표시가 뜨는지 모르겠다.
끓어오르는 분노 비슷한 감정이 목까지 차오를 때도 있지만, 그럴 때 나는 마음속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쓸모없는 에너지 낭비는 사치이며 분노도 체력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나이가 알려줬다.
새해에 다시 읽을 책을 떠올리다 보니 반성이나 성찰보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유시민 작가의 <공감필법>을 꺼내 들었다.
올해 나에게 가장 필요한 생존 기술 같았다. ‘공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적어 내려가며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자리에 잠시 앉아보는 일이 요즘의 나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숙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 블로그 카테고리를 조금 손봤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작년 중반에 했을 일들이지만 이제야 다시 꺼내 드는 일들이라 손이 살짝 서툴다.
그래도 방향은 잊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서 관련 포스팅을 조금 더 늘리기로 했고 잠시 멈췄던 스레드 업로드도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어떤 이유로도 멈춤이 없었으면 좋겠다. 동시에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도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마음을 조금씩 세상에 풀어놓는다.
오후에 막내와 은행 업무를 보러 잠시 외출을 했다. 은행이라는 곳은 이상하게도 돈을 확인하러 가는 곳인데 마음속에서는 자꾸 시간이 먼저 계산된다.
오늘도 숫자보다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아내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매달 5만 원씩펀드에 가입을 했다. 큰 결심이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웠다.
그 돈으로 나중에 대학 등록금을 내고 성인이 되면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보태겠다며 그러나 막내의 펀드는 작년 아내가 쓰러진 뒤로 멈춰 있었다.
의도적인 중단이라기보다는 삶이 잠시 자동이체를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잠시 멈춰선 것은 건강만이 아니였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2010년부터 쌓인 원금은 600만 원, 현재 금액은 약 840만 원이었다.
수익률 40%라는 숫자를 보고
나는 잠시 막내보다 펀드를 더 대견해했다.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던 펀드는 기다림이라는 말이 떠오르며 매달 5만 원씩, 술 한번 안마시고 아끼며 넣던 돈이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환매는 막내 생일이 지나야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부모가 서류를 챙기오면 바로 가능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는 자금이었다.
혹시나 막내가 생일 이후 어둠의 유혹에 홀리지 않는다면 그 돈은 통장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요즘 가장 성실하게 일하는 건 아마 이 돈일 것 같다.
오늘부터 일기에 작은 변화를 주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일기 속에서 굳이 ‘투병’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병원에 가는 날이나 몸이 수상하게 신호를 보낼 때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외의 날들까지 아픈 과거를 불러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흔적이라는 게 그렇다. 자꾸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던 마음까지 괜히 욱신거린다. 이미 지나온 일인데도 복기하다 보면 현재의 하루까지 눌러앉게 만든다.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이제는 그 과정을 매일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몸은 알아서 회복 중이니 마음은 조금 더 밝은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려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글을 재미있게 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픔 이후로 내 글도 같이 진지해지고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깊은 사유와 책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 가져가되 일기만큼은 충실하고 유머러스한 나로 남기고 싶다.
하루를 정리하는 기록이
반성문처럼 느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2026년의 나는 조금씩 다시 나로 돌아가는 해를 만들기로 했다. 속도를 내지는 않겠다. 대신 멈추지도 않겠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웃을 수 있는 날은 웃으면서 그렇게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오는 한 해를 써 내려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