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막내는 캔맥주, 나는 무알콜, 안주는 피자.

by 마부자


2026년의 첫 번째 토요일이라고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침의 시작은 늘 그래왔듯 변함이 없었다.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떠 베란다에 서서 이 동네의 아침을 알리는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하울링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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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는 이제 낯설지 않아서,

불쾌함보다는 아,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 하는

생활의 신호처럼 받아들여진다.


안방과 작은방은 아직 조용했고, 이른 시간 하울링을 하지 않는 두 마리의 하이에나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마 조금만 지나면 배고픔을 이유로 문을 열고 나와 작은 소리부터 점점 커지는 하울링을 시작할 게 분명했기에, 그 전에 나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얼마 전 블벗이신 희망꽃님께서 하와이대저택을 좋아하는 나를 떠올리며 챙겨 두셨다며 손편지와 함께 건네주신 선물이었다. (희망꽃님 감사합니다.^^)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먼저 읽히는 느낌이 들어서, 오늘의 독서는 글자를 따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고마움을 곱씹는 시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대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데, 그 감미로운 톤으로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겹쳐진다.


책이 아니라 한 편의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페이지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더 의식하지 않게 되는 오전이었다.


서평을 정리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즈음, 안방 문 안쪽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만으로도 나는 아내가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요즘 들어 그 기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조선시대에 어르신께 “기침하셨습니까”라고 묻던 이유가 이해되는 것 같다.


아마 그 기침은 몸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나 깼다’라는 생활의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작은방 문도 조심스럽게 열리고 막내가 침대에 앉아 작은 하울링을 시작했다. 아빠라는 부름을 모른 척하면 곧바로 톤이 바뀐 아빵으로 이어지고, 그 소리는 더 이상 부름이 아니라 요구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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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배고픈 두 마리의 하이에나는

소파에 앉아 TV 볼륨을 높이며

서재에 있는 내게 신호를 보냈다.


거실로 나가니 하늘로 뻗친 머리의 막내와 좌우로 자유롭게 뻗친 머리의 아내가 나를 반겼다. 그 장면을 보면 순간 묘한 허탈감 같은 감정이 밀려오지만 웃음으로 넘겼다.


주말의 아점은 늘 그렇듯 토스트였고, 계란으로 지단을 만들고 야채와 햄을 썰어 샐러드를 준비하며 이 집의 평온한 리듬을 다시 맞췄다.


막내는 오후 알바를 향했고 아내는 볼링장으로 향했으며, 집 안에는 오랜만에 조용한 오후가 찾아왔다.


선물 받은 하대 작가의 <밤과 나침반>서평을 마무리하고 스레드와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나만의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이른 저녁 무렵, 막내가 며칠 전 할머니 집에 갔다가 도미노 피자 쿠폰을 받아왔다며 오늘은 그걸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건강한 음식을 드시는 어머니께서 피자 쿠폰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과 그 피자가 유명브랜드인 도미노라는 점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걷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 걷기 어플로 쌓인 포인트가 어느새 오만 점에 가까워졌고, 그걸 손주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평소 피자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이라 유명 브랜드 피자를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었고, 광고 속에서 보던 피자들은 늘 가격만 비싼 음식이라는 선입견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덕분에 유명브랜드의 피자를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간 생각해보니 이 피자는 결국 어머니가 발품을 팔아 선물하신 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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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발품을 팔아 선물한 피자”


이 문장의 단순의미만 놓고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고 아픈 사연같지만 오늘의 사연은 기쁘고 웃음 가득한 사연으로 마무리 한다.


막내는 피자를 주문한 뒤 다시 하울링 하는 듯한 느끼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가지 제안을 더 했다.


피자만 먹으면 느끼한데 오늘은 콜라 대신 맥주를 마셔보는 것이 어떨까요?

금주중인 내게 지금 던지는 막내의 의견은 곧 피자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떤 화도 낼 수가 없었다. 예전의 나와 아내가 아이에게 보여주던 그 모습이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정타는 “이 추운 날씨에 나가서 사오는 건 제가 할게요”라는 막내의 말이었고, 그 순간 나는 이 녀석이 이제 술을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씁쓸함과 웃음이 동시에 올라왔고, 부모의 가정교육이라는 단어가 괜히 머릿속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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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가 도착한 뒤 박스를 열자

손흥민 선수가 피자 박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내는 자신의 앞에 파란 캔맥주를 놓고 우리 부부 앞에는 흰 무알콜캔을 가지런히 놓았으며, 건배 후 들려오는 캬 하는 목넘김 소리에 격세지감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처음 보는 막내의 모습 때문인지, 오랜만에 먹어서 인지 유명한 피자라 기대했지만 한입 베어 문 순간, 역시 내 입맛에는 동네 피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이 피자가 어머니의 발품으로 만들어진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맛보다는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웃음이 따라왔다.


할머니가 발품 팔아 사주신 피자니 끄트머리까지 남기지 말라고 하자 모두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앞으로 막내는 맥주를 마시고 우리는 무알콜 음료를 마시는 풍경이 이 집의 새로운 일상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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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의 가장 큰 변화는 피자의 맛도 아니고 맥주의 종류도, 또한 어머니의 발품을 이용한 피자도 아니었다.


아침의 하울링에서 저녁의 건배까지, 이 집의 소음 주파수가 조금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가장 큰 하울링의 주인공이었고 이제는 그 자리를 막내가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나는 무알콜 캔을 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쪽이 되었고 막내의 술안주를 챙겨야 하는 그 변화가 서운하기보다는 제법 웃기게 느껴졌다.


2026년의 우리 집은 맥주 캔의 색으로 세대가 구분되고 하울링의 톤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중이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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