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결국 집에서 캔맥주 여섯 개를 나눠 마신 아내와 막내는 아침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실은 두사람이 출근한 뒤 찾아오는 평일처럼 조용했고, 집 안에는 전날의 웃음과 빈 캔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혼자만의 새벽을 아침부터 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외롭다고 부르겠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이 시간이 요즘 꽤 마음에 든다.
괜히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가장의 배려’를 실천하는 척했지만, 사실 깨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달리지 않을 때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다른 책을 찾다가 <노르웨이 숲>을 집어 들었다.
커피를 한 잔 내려 식탁에 올려두고 첫 장을 펼쳤다. 집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소설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렇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침이라면 하루쯤은 책에게 통째로 내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 두사람도 어제와 같은 휴일을 보낸다. 아내는 볼링장으로 막내는 알바을 위해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하루 종일 <노르웨이 숲>을 읽으며 보낸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많이 읽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래 산책을 다녀온 기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아주 일상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평범함 안에서 묘하게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있었다.
차가운 하늘 한가운데 뜨거운 해가 떠 있던 오후,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뜨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잠깐 다녀온 기분이었다. 꿈이었는지, 방금 읽은 문장이었는지 헷갈리는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있었다.
아내가 돌아와 저녁을 함께 먹은 뒤에도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이쯤 되면 오늘의 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보다 ‘독서 중독자’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했다.
커피를 한잔을 내려놓고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허전했다. 책 때문인지, 하루키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괜히 음악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왜 재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재즈가 생각이 났다.
52년을 살면서 재즈를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들은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물론 선택은 내가 했지만, 실제 선택은 유튜브가 다 해줬다.
나는 그냥 재즈라는 단어를 눌렀을 뿐이다.
방 안에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자, 갑자기 내가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착각이 오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잠시 후 아내가 서재 문을 빼꼼히 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건... 무슨 음악이야?”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내는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분위기 전환도 좋은데, 사람이 한 번에 확 변하면 못 써.” 그리고는 아주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그 문 닫는 소리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재즈를 틀어놓은 내 모습이
나 스스로 봐도 꽤 웃겼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책도, 음악도, 나 자신도 오늘 하루만큼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게 오늘 하루키와 재즈가 나에게 가르쳐준 가장 현실적인 교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음악에 조금만 집중하다 보니, 의외로 귀에 익는 곡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 오늘 처음 ‘제대로’ 듣는 재즈인데, 어디선가 이미 여러 번 스쳐간 얼굴들 같았다.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았지만, 재즈도 이미 내 일상 어딘가에 슬그머니 자리 하나쯤은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몰랐지만, 재즈 쪽에서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책을 읽으려고 틀어놓은 재즈 덕분에 독서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한 문장을 읽고, 음악을 듣고, 다시 그 문장을 읽었다.
같은 페이지를 세 번쯤 넘기다 보니, 이쯤 되면 독서인지 감상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건지, 분위기를 음미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건지도 불분명해졌다.
결국 이른 저녁이 되어서야 책갈피를 꽂았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은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닌 느낌이었다.
아무 사건도 없고, 특별한 결심도 없는 하루였지만 이렇게 조용히 시간을 채워주는 것도 책이 가끔 보여주는 가장 큰 재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 재주를 아주 충분히 누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