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아직 밤과 아침의 경계가 남아 있는 새벽이다. 베란다로 스며든 공기는 차갑고 고요하며, 몸보다 먼저 생각을 깨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지만, 이 시간은 단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차 한잔이 식기 전 작년의 생각들이 담긴 형광펜의 흔적을 찾는 책상 앞에 앉는 이 짧은 시간이, 내 하루의 방향을 정하는 출발선이라는 사실을 나는 점점 또렷하게 인식한다.


오늘도 공감필법 속의 한 문장이 나를 붙잡았고 밑줄까지 그어둔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문장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한 단어에 멈춰 섰다. 해석이라는 단어였다. 말이나 글의 의미를 설명하는 단어라는 사전적 정의보다 훨씬 큰 단어처럼 느껴졌다.

“내가 달라지며 같은 텍스트도 다르게 해석하게 되고, 텍스트를 다르게 해석하면 그 해석을 토대로 한 삶의 태도를 또 바꾸게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공감필법중에서 - 53page






해석.

1. 말, 글, 기호, 사건 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

2. 같은 대상이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정.


해석은 단순히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는 결국 해석 때문이었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오래전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떠올랐다.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우리의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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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늘 추상적으로만 머물러 있었는데,

오늘은 또렷하게 연결되었다.


상황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해석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결국 삶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그동안 너무 자주 상황 자체를 탓해왔다.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것이 나를 괴롭힌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나의 해석이었다.


같은 실패를 어떤 날은 좌절로 받아들였고, 또 어떤 날은 통과의례로 받아들였다. 그 차이는 외부에 있지 않고 오직 내 안에 있었다.


해석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삶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단어는 사회 전체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구분 역시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같은 역사적 사건을 두고도 누군가는 진보의 증거라 말하고, 누군가는 붕괴의 신호라 말한다. 사실은 하나인데 해석은 수없이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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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지점에서 해석의

위험성과 필요성을 동시에 느낀다.


해석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가장 쉽게 갈라놓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같은 사실을 두고 각자의 해석이 덧붙는 순간, 대화는 이해가 아니라 설득이 되고 설명은 곧 변명이 되며 결국 말은 서로를 향해 날이 선다.


해석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입장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된다. 그 방패는 때로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타인과 나 사이에 벽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을 멈출 수는 없다. 해석을 멈춘다는 것은 생각을 멈추는 일과 다르지 않고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며, 의미를 찾는 행위 자체가 곧 해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어도, 해석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침묵조차도 누군가에겐 무시로 해석되고, 거리 두기는 차가움으로 해석된다.


결국 문제는 해석의 유무가 아니라, 해석을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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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해석이 유일하다고 믿는 순간,

그 해석은 이해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해석을 주장하기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두려 한다. 이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 그것이 해석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는다.


인간은 해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침묵조차도 해석의 대상이 되고, 무관심조차도 하나의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나는 해석을 감정의 문제로 바라본다. 투병당시 몸이 지치고 마음이 약해졌을 때, 같은 말도 같은 상황도 훨씬 더 날카롭게 해석되었다.


그 시기의 나는 세상보다 나를 더 공격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음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같은 말이 위로처럼 들리고, 같은 상황이 견딜 만한 하루로 해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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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내 상태를 정확히 반영하는 거울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해석을 훈련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해석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지나치게 나를 몰아붙이는 해석을 의심해보는 연습이다.


이 해석이 과연 유일한 해석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모든 상황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몫이다. 그 선택이 오늘 하루의 무게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해석을 바꾸는 일은 삶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조금 더 오래 붙잡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버티기 위해, 계속 걷기 위해, 나는 나를 덜 다치게 하는 해석을 선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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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긍정적인 해석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나를 파괴하지 않는 해석은 가능하다.그 정도면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에는 충분하다.


해석은 나를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방패가 된다. 나는 이제 해석을 무기로 쓰기보다 숨 고를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새벽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떠올린다. 내가 달라지면 같은 문장도 달라진다는 사실.


그 문장은 결국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삶은 바뀌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해석은 바꿀 수 있다고.


나는 ‘해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해석은 의미를 찾는 인간의 본능이지만, 유일하다고 믿는 순간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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