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아직 밤의 기운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늘 하던 루틴처럼 차를 마시며 책을 펼친다.몸이 먼저 움직이는 동안 생각은 천천히 따라오며 오늘의 사유를 넓혀본다.


공감필법의 제목처럼 글쓰기에 대한 정의를 설명하는 문장이 흘러나왔고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중심에 두게 되었다.

“글쓰기는 뭐냐?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정보, 옳다고 믿는 생각,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공감필법 중에서 - 61page


표현.

1. 마음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는 행위.

2. 언어, 행동, 이미지 등을 통해 의도나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


사전은 표현을 마음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이자 언어와 행동과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내가 살아오며 느껴온 표현의 무게와 긴장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꼈다.


개념으로서의 표현은 단순히 안에서 밖으로 옮기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감정의 층위로 내려가 보면 표현은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과 상처의 위험을 함께 동반하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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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표현하지 않는 쪽을 택하며

침묵을 성숙이나 인내로 포장한다.


그 선택은 개인의 성향을 넘어 어느새 사회가 요구하는 태도가 되어버렸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더 현명하다는 인식이 일상처럼 굳어졌다.


조용히 참는 태도는 갈등을 줄이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뒤로 미루는 방식일 때가 많고 그 사이 말해지지 않은 생각과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방향을 잃은 채 쌓여간다.


현실의 사회 구조는 더욱 표현을 어렵게 만든다.


조직 안에서는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문제 제기가 꺼려지고 관계 속에서는 솔직함보다 원만함이 우선되며 침묵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처세로 인정받는다.


그 결과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은 개인의 몫으로 전가된다.


사회는 조용함을 요구하면서도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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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질서를 유지하지만

그 대가는 개인의 소진으로 치러진다.


최근의 여러 사회적 사건들을 돌아보면 오랜 침묵 끝에 한꺼번에 터져 나온 이야기들이 많았고 그 말들은 갑작스러운 분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억눌려 온 표현의 지연된 형태였다.


표현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더 안전한 방향으로 정제되지 못한 채 왜곡된 언어와 과도한 반응으로 나타나며 사회는 그것을 다시 문제 행동으로 규정한다.


침묵을 강요하는 구조 속에서 개인은 점점 더 말하는 법을 잃어간다.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어휘는 줄어들고 불편함을 느껴도 정확히 무엇이 불편한지 알지 못한 채 견디는 데 익숙해진다.


이런 현실 속에서 표현은 단순한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건강과 직결된 문제로 보인다.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결국 극단적인 방식의 표현만이 주목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표현을 다시 개인의 용기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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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은 허용되어야 하고 연습될 수 있어야 하며

안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침묵을 미덕으로만 소비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태도가 먼저 변해야 한다. 표현을 불편함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적 감수성이 그 출발점이 된다.


나 역시 오랜 시간 동안 표현을 미루며 말하지 않는 것이 나를 보호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말하지 않은 생각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나의 판단과 감정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글쓰기는 나에게 표현의 가장 안전한 통로가 되었고 말로는 꺼내기 어려웠던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옮기며 나는 표현이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고 감정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해석이었으며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들 속에 감정이 깊게 섞여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천의 차원에서 표현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오늘의 상태를 한 문장으로 기록하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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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소한 반복이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의 밀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는데 아픔과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으면 강해 보일 수는 있었지만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밤마다 다른 얼굴로 되돌아와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해결을 기대하지 않고 기록을 선택했다.


그 기록들은 문제를 없애주지는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과 지금의 상태를 감당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질서를 내 안에 만들어주었다.


나는 ‘표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표현은 침묵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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