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아직 밤의 기운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베란다로 스며든 공기는 차갑고 고요했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곱씹었다.


타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저자의 사유를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공분을 느끼는 능력은 문명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더군요.


사회적 공분을 느끼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에 속한다니 반갑지 않습니까?

역시 공부는 좋은 겁니다.

공감필법 중에서 - 47page



공분

1.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통으로 느끼는 분노나 분개.

2. 사회적으로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에 대해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분노.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한 공분이라는 단어가 오늘따라 오래 머물렀다.


공분이 문명이 만든 도덕이 아니라 생존의 과정에서 획득된 능력이라는 설명은 이 감정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보여준다.


이를 좀 더 넓게 해석하면 분노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종의 기억에 속한다는 사실이고 묘하게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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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분은 사전적으로 개인의 분노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다수가 함께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된다.


나는 이 정의가 공분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함께 느낀다는 말은 연대이지만 동시에 동원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분노가 모이면 질문이 되고 문제 제기가 되며 변화의 방향을 찾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잃는 순간 공분은 생각을 멈춘 감정으로 변한다. 요즘의 사회적 공분을 바라보면 나는 종종 불편함을 느낀다.


공분이라는 이름 아래 일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이 감정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분노는 쉽게 모이지만 쉽게 식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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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누군가는 그 열기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 채 폭발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공감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공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공감은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섬세한 반응처럼 보이고, 공분은 집단의 외부로 분출되는 거친 감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 보면 이 두 단어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공분은 갑작스레 생겨나는 집단적 분노가 아니라, 개개인이 느낀 공감이 축적되고 증폭된 결과에 가깝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감정, 그 감정들이 겹치고 포개질 때 공분이라는 형태를 띤다.


그렇게 보면 공분은 분노라기보다 거대한 공감의 덩어리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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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한다.


각자의 분노를 모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묻고 어떻게 바꿀지 논의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공분은 해결보다 처벌에 더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


개개인의 분노를 한 지점에 모아 상대를 파괴하는 장치처럼 작동할 때 나는 이 감정이 생존의 본능이 아니라 소모의 본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시민작가가 말한 것처럼 돈과 권력을 가졌으나 인간적으로 비천한 자들이 고귀한 감정을 지닌 사람들을 경멸하는 시대에 느끼는 공분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내가 투병 과정에서 공분이라는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그것이 과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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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개인의 일이니 분노 역시 개인의 몫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내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슬픔만은 아니었다.


처음 병을 마주했을 때 나는 조용히 받아들이려 애썼다.


몸의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키우고 싶지 않았고, 분노는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안쪽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공분은 누군가를 향한 직접적인 분노는 아니었다. 병을 만든 대상도, 명확히 책임질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마주친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나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치료의 과정이 사람을 살리는 동시에 사람을 소진시키는 현실 앞에서, 이 고통이 왜 이렇게 당연한 절차처럼 반복되는지 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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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공분은 나 하나의 아픔에서 출발했지만

곧 타인의 아픔으로 확장되었다.


이 공분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분노가 아니라 인간다움을 지키고 싶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분은 오히려 나를 무력하게 만들기보다 나를 깨어 있게 만든다.


나는 공분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의 분노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정해준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놓치는 순간 공분은 생각을 대신해 버린다.


공분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이제 다음 단계를 선택해야 한다.


분노를 느끼는 데서 멈출 것인지 분노를 사유로 바꿀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나는 ‘공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공분은 함께 화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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